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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도서 - 하나님을 알자!/예수님을 만난 이들의 이야기

뜻밖의 회심 / 로자리아 버터필드 / 아바서원

by 현명소명아빠 2019. 12. 8.

Main category: 신앙도서 - 하나님을 알자!

  • Subcategory: 예수님을 만난 이들의 이야기
  • 추천 대상:
    • 교회와 신앙 안에서만 나고 자라서 외부에서 교회를 바라보는 시선이 익숙하지 않으신 분
    • 성소수자에 대한 교회가 가져야 할 자세에 대한 좋은 예시를 발견하고 싶으신 분
    • 회심과 영접의 단계 단계에 대해 알고 싶으신 분

이 책을 처음 보았을 때 짐작되는 내용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실 어떤 극적이거나 신파적인 내용이 예상돼서 그런 쪽에 집중하기보다는 성소수자 분들이 복음을 접했을 때 어떻게 회심과 영접을 하는지에 대해 집중해서 보려고 했는데, 실제 책장을 넘기며 제가 예상한 모습과는 많이 달라서 더 집중하며 읽은 책입니다.

 

저자는 대학 부교수이자 종신교수 자격을 부여받은 엘리트 여성이고, 학과장을 맡는 동시에 성소수자 인식 개선에 앞장서는 역할을 맡고 있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리고 레즈비언이자 사회운동가이기도 한 인물입니다.

 

여기까지 나열한 수식어 만으로도 그리고 그의 본인의 의견으로도 그가 얼마나 복음과 먼 인물인지를 짐작할 수 있을 거 같습니다.

 

그런 그에게 있어 기독교인들에 대한 인식은 상당히 확고하게 좋지 않았습니다.

내게는 기독교인들이 엉성한 사고의 소유자들처럼 보였다. 빈곤과 폭력, 인종차별과 같은 이 세상의 실제적인 문제들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들이 지닌 비현실적인 세계관이 가능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책을 읽어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듯했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천박하다'라고 조롱하는 방식, 즉 토론을 심화시키고 풍요롭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서둘러 종결시키기 위해서 막무가내로 성경책을 끌어들이는 것처럼 보였다.

그들이 걸핏하면 들먹이는 "성경말씀에 의하면"이라는 말은 정상적인 사고를 포기하라는 주문처럼 들릴 뿐이었다. 그 말이 나오면 영락없이 얼마 지나지 않아 대화가 파국을 맞았으니까. 그들이 자주 사용하는 캐치프레이즈나 상용어구들도 역겹기는 마찬가지였다. "예수님이 답입니다."라는 말을 들으면 지금도 뿌리 없이 서있는 나무를 보는 느낌이 든다.

답은 질문이 주어진 다음에 나오는 것이 정상이다. 질문에 대해서는 구체적이고 설득력 있는 답을내놓아야지 모든 것을 다 덮어버리는 포괄적인 말을 답이라고 내놓아서는 안 된다. "정말 놀라운 하나님의 축복이에요"라는 대답을 들을 때마다 십계명의 세 번째 계명(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을 어기는 짓거리, 또는 값싼 감상으로 뒤범벅된 너절한 감사카드를 보는 느낌이 든다. 
..(중략)..

그들이 반지성적인 사람들처럼 보인다는 것 외에 내가 기독교인들에게 느끼는 두려움이 한 가지 더 있었다.
..(중략)..

레즈비언들의 공동체는 내게 안전하고 안정된 보금자리 같은 느낌을 주었다. 그곳은 내가 가장잘 알고 아끼는 사람들이 속한 공동체 이기도 했다. 하지만 레즈비언 공동체가 다가오는 사람들을 팔 벌려 포용하고 환영하는 반면에 기독교인들의 공동체는 배타적으로 보였고(실제로 그런 경우도 많다) 쉽게 사람들을 정죄하려 들거나 냉소적이고 이질적인 요소가 그들에게 섞일까 봐 두려워하는 것 같았다. (본문 p25-26)

 

이 부분을 읽으며 등골이 오싹하고 얼굴이 벌개져왔습니다. 아니라고 반문하고 픈 분들도 많으시리라 생각합니다. 우리 공동체는 아니라고 이야기하고 싶으신 분들도 많으실 겁니다. 그렇지만 상처는 준 사람 기준이 아니라 받은 사람 기준으로 생각되어야 하듯, 교회 밖에서 바라보는 교회를 향한 시선은 우리 성도들이 분명히 인지하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그래서 이 글이 더 귀하다고 생각이 듭니다.

 

그래도 아니라고 말씀하고 계신 분께선 내가 최근에 반갑게 맞이하고 시간을 따로 내서 새로 방문한 이들의 이야기를 듣거나 방문한 기억이 있는지만 돌아봐도 답은 나올 것 같습니다. 기독교 진리는 배타적입니다. 왜냐하면 구원의 길은 오직 예수님 한 분 뿐이기 때문이고, 세상 종교가 말하는 어디에나 신이 있다는 범신론도, 선행으로 구원을 이룰 수 있다는 자력 종교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기독교 진리가 배타적이라고 해서 기독교인들이 그런 태도를 가져선 안될 것입니다.

 

안 그래도 복음은 친절하지도 듣기 좋지도 않습니다. 왜냐하면 듣는 이가 스스로가 죄인임을 인정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복음의 씨앗이 어떻게 교회 밖의 사람들에게 뿌려질 수 있을까요? 

그 단서를 저자가 복음을 받아들이게 된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과의 만남의 장면에서 찾아보고자 합니다.

시러큐스 개혁장로교회 담임목사 켄 스미스가 보낸 편지도 그런 편지들 가운데 섞여 내게 왔다. 그의 편지는 매우 친절한 어투로 나 자신도 간절히 대답하고픈 그런 질문들을 묻고 있었다. 당신은 투고에 실린 결론에 어떻게 이르게 되었는가? 당신은 자신의 의견이 옳다는 것을 어떻게 검증할 수 있는가? 당신은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가? 켄 목사는 내 글의 근거가 되는 전제들을 더 깊이 연구해 보라고 권하고 있었다.
..(중략)..

전화상으로 얼마간 즐거운 대화를 나눈 후 그가 나를 저녁 식사에 초대했다. 하지만 전화를 끊기 전에, 그때서야 생각이 났는지, 초면인 사람의 집으로 저녁 식사를 하러 오는 것이 부담스러우면 자신과 아내가 근처의 레스토랑으로 나가는 것도 좋다고 했다. 나는 그가 아주 사려 깊은 사람, 아니 거의 기사도를 따르는 사람처럼 여겨졌다.
..(중략)..

저녁으로 채식주의자를 위한 볶음요리를 준비했다는 플로이의 말을 듣고 얼마나 안도감을 느꼈었는지는 지금도 기억난다. (도덕적인 이유에서는 물론 건강상의 이유로 나는 채식을 하려 노력하고 있었다.)
..(중략)..

꽤 더운 칠월 날씨였지만 두 사람이 에어컨을 틀지 않고 있었다는 점도 마음에 들었다. (나는 환경문제 전반에, 특히 오존층에 대해 관심이 많았는데 그들도 그런 것 같았다.)
..(중략)..

나는 그들과 친숙해지고 싶었지만 내 도덕적인 잣대들을 포기할 만큼은 아니었다. 레즈비언으로서의 내 정체성, 동성애 문화, 가치관들이 내게는 훨씬 더 중요했다. 삶의 경험뿐만 아니라 연구와 사유의 과정을 통해 나는 내가 지닌 문화, 가치들을 소유하게 되었다. 

내가 켄과 플로이를 보고 바로 마음에 들어했던 것은 그들이 그런 점에 민감했기 때문이었다. 비록 그 두 사람과 나는 명백한 차이점을 지니고 있었지만 그들은 내가 빈 칠판 같은 상태로 그곳에 서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 내게도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와 견해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처럼 보였고, 대화를 하면서도 충분히 나를 존중해 주었다.
..(중략)..

켄과 플로이는 내가 어떤 인간인지 파악하려 들지 않았고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고 내말을 경청해 주었다. 그들은 기독교인의 동정심을 가지고 이방인인 내게 다가오는 긴 여정을 시작하려 했다. 식사 중 그들은 내게 복음에 대해 말을 하지 않았고 식사 후에도 교회에 나오라는 말 같은 건 하지 않았다. 으레 나오리라 예상했던 말들이 나오지 않은 덕분일까 식사 후 켄이 나랑 계속 연락을 하며 지냈으면 좋겠다고 제안을 했을 때 나는 부담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본문 p36-37)

 

그런 부담감이 있는 것 같습니다. 교회 밖 사람이 교회 안 사람을 만날 때..

 

직접 경험해 본 경험에서 아니면 주변 사람들의 경험으로부터의 간접 경험에서든... 많은 사람들이 막연한 두려움이 있습니다. 무례함에 대한 혹은 쉽게 정죄함에 대한 그런 기억들이 차곡차곡 쌓여 무언가 다른 관점을 만들어내고 그 관점이 교회 안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되살아 나는.. 그런 모습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이런 분들을 뵐 때마다 신앙인으로서 어떤 자세로 사람들을 대해야 하는지에 대해 고민하고 스스로를 경계 하게 됩니다. 나의 섣부른 말이나 툭 던지는 멘트들이 누군가에게 평생에 걸쳐 복음을 접하는 데 있어 가장 큰 걸림돌이 되지는 않을까 하는..

 

그런 의미에서 켄 목사님과 플로이 사모님의 모습은 정말 성도들이 어떤 자세로 사람들을 대하고 신앙인이 어떤 겸손함과 예의를 가지고 대해야 하는지에 대한 좋은 모범이 되는 것 같습니다.

 

이 책에서 저자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 부부와의 첫 만남에서 첫번째 식사를 위해 본인을 교회로 초청했다면 그 즉시 뺑소니를 놓고 다시는 그들을 만나지 않았을 거라는 말에서 느껴지듯 깊은 인내와 진심을 가지고 대해야 함을 배우게 됩니다.

 

그런 안정적이면서 상호 신뢰가 쌓인 관계가 구축된 이후 켄 목사님의 주도적인 복음 전파로 인해 저자가 변화된 것이 아님을 보게 됩니다. 물론 모든 관계, 모든 사람에 대해 동일하게 진행되리라 보는 것은 어렵지만, 그 관계를 통해 그리고 사람을 통해 하나님을 다시 바라보게 된 저자는 스스로 복음을 알아가기 시작합니다. 전 이 부분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요. 인간관계에 의해 마지못해 걸음 하는 신앙생활은 그 나름으로도 가치가 있겠지만 쉽게 무너지거나 쉽게 변질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스스로 복음과 자신을 비교해 나가며 가치관의 갈등과 충돌을 느끼고 감수하고 싸우고 고민하는 가운데 얻은 복음과 믿음은 그 든든함이 분명 다름을 보게 됩니다.

 

그렇다고 앞서 얘기한것처럼 인간관계에 의해 마지못해 걸음 하며 시작한 신앙생활을 폄하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복음을 들을 수 있다면 분명 가치가 있을 것입니다. 요지는 복음을 듣는 것에서 끝나지 않고 그렇게 살기 위해서 겪는 변화들은 누군가가 대신해 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저자는 그 치열한 싸움과 변화를 스스로 싸워냅니다. 그리고 힘들거나 무너질 때에는 섣부른 조언이 아닌 항상 옆에서 든든히 있어주고, 믿어주며, 기도해 주는 동역자들의 조언과 도움을 받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진정한 동역자이자 중보자들의 태도라고 생각합니다. 묻지도 않은 조언을, 특히 자신의 신앙 경험을 무조건적으로 진리라 믿으며 강요 아닌 강요를 하는 것은 정말 좋지 못한 자세입니다. 그런 모습은 중보 대상자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 자칫 내 생각을 기준으로 그 사람을 통제하거나 조종하는 것으로 변질되기 쉽습니다.

 

저자는 자신의 변화를 드디어 느낄 정도로 자신이 변화되고 있음을 알아챕니다. 그러는 가운데 고민과 어려움이 있을 때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필요한 지식을 쌓기 위해 말씀을 읽고 책을 찾아 읽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선후가 바뀌긴 했지만, 뒤에 있는 내용을 인용하며 살펴보고자 하는 내용은 교회 밖의 사람이 복음을 통해 회심을 하면서 느끼는 교회의 모습이 얼마나 처참한지를 보고자 합니다.

성경에 묘사된, 그리고 내가 실제로 경험한 혹독한 회심의 과정을 고려할 때, 지금의 복음주의 문화가 정형화시킨, 믿음은 손쉬운 것이라는 생각들이 가져올 수도 있을 결과를 생각하면 두려운 마음이 든다. 내가 사는 지역만 해도 복음주의의 놀이공원이라 할 만한 지역이다. 이웃들 중 몇 집은 지역의 대형교회들에 출석하고 있는데 교회 안에 패스트푸드 식당들이 입점해 있고 유명한 커피 체인점들과 바람을 채운 거대한 고무 놀이기구들을 가져다 놓았다.
..(중략)..

릭 워렌 목사는 목적이 이끄는 삶이라는 자신의 책에서 회심을 다음과 같이 고백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예수님, 제가 당신을 믿고 받아들입니다." 죄인들을 받아들이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라 자신의 말에 믿음을 거는 행위는 사람들을 그릇된 희망의 함정에 빠지게 한다. 릭 워렌 목사가 사람들에게 구원을 보장하는 방식은 위험스러울 정도로 잘못된 것이다. 그는 계속 설명을 한다. "만약 당신이 신실하게 그 기돌르 드렸다면 이제 축하를 받을 차례입니다. 하나님의 가족이 된 것을 환영합니다." 내 기도가 신실한지 여부를 내가 어떻게 판단할 수 있을까?  구원의 은혜는 구속할 자를 선택하시는 거룩하신 하나님, 오래 참으시고 자신을 희생하시며 순종하신 구세주께 속한 것이다. 이렇게 큰 은총이 어떻게 내 신실함에 달려 있을 수 있겠는가? (본문 p81-82)

교회는 편의와 새신자들에게 다가오기 쉽게 하기 위해 변하는 것은 찬성하지만, 그 본질을 위협할 정도가 된다면 그것은 경계해야 할 것입니다. 교회는 성도들에게 그리고 새 신자들에게 분명히 알게 해야 합니다. 복음은 친절하지도 않고, 편하지도 않고, 쉽게 받아들여질 만한 내용도 아님을 말이죠.

복음은 듣는 이를 죄인이라 합니다. 당신이 틀렸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복음이 그토록 쉽게 받아들여진다? 전 그것은 위선이고 거짓이라 감히 표현하고 싶습니다. 


그런 가운데 저자에게 든 고민은 "왜 동생애가 죄인가?" 하는 부분이었습니다.

 

그걸 왜 죄인줄 모르지? 하며 분개하시는 분이 계시다면... 그 근거를 제시할 수 있는 성경 구절이 있는지 반문해 보고 싶습니다. 예전에 제가 아는 분에게 그 반문을 했더니 창세기에 나온 소돔과 고모라 멸망 사건을 예로 들었습니다. 이 책의 저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소돔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는 동성애를 응징하기 위해서라고 알고 이해하고 있었지요. 그런데 왜 그렇게 하셨는지에 대한 말씀이 있는 것을 이번에 이 책을 통해 알게 되었습니다.

에스겔서 16장

네 아우 소돔의 죄악은 이러하니 그와 그의 딸들에게 교만함과 음식물의 풍족함과 태평함이 있음이며 또 그가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도와주지 아니하며 거만하여 가증한 일을 내 앞에서 행하였음이라. 그러므로 내가 보고 곧 그들을 없이 하였느니라

 

소돔의 멸망은 동성애에 대한 응징이 아니라, 그들의 1) 교만함과 2) 풍족한 가운에서도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돕지 않고 3)가증한 일을 하였기 때문으로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네 아우 소돔이라 표현함으로 실상 이 구절의 대상이 이스라엘 민족에 대해 그들의 숨겨진 죄악을 지적하시는 도구로 이 예를 들었음을 알게 됩니다.

 

죄의 선 후 구조에 대해 저자는 아래와 같이 적고 있습니다.

자만, 부요, 도락에의 집중, 자비와 겸손의 부재. 이런 죄악들 자체에서 본질적으로 성적인 요소들을 찾아볼 수는 없다. 우리는 흔히 죄가 논리나 심리학에 의해 설명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성적인 죄가 성적인 혹은 감정적인 원인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그것은 우리가 지나치게 협소한 시각으로 성애를 바라보기 때문이다. 

성적인 활동은 침대에서 벌어지는 일들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넓은 범위의 욕구들, 필요와 갈급함 등을 포함한다. 성애는 우리의 삶이 처해있는 상황의 원인이라기보다는 그 표현으로서, 근원이나 기원이라기보다는 결과에 가깝다. (본문 p74)

 

우리는 현상에 집중하는 그 에너지를 조금이나마 그 근원에 집중해야 할 필요가 있음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동서애는 분명한 죄이지만, 동성애에 집중하기 앞서 그 근원에 무엇이 있는지를 바라보고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고 고민해야 할 것입니다.

 


이 책은 여러가지를 알게 합니다. 

 

1. 교회 밖에서 바라본 교회의 모습

2. 교회 밖의 사람들에게 성도들은 어떤 자세로 그들을 대해야 하는가?

3. 성소수자들이 그들의 정체성과 그들의 공동체에서 느끼는 부분은 어떤 것인가?

4. 교회는 어떤 부분에서 교회 밖 사람들을 불편하고 갈등하게 하는가?

5. 복음을 통한 회심은 어떤 과정을 거치는가

 

이런 이유로 이 책을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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