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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도서 - 하나님을 알자!/믿고 보는 저자 - 신앙편

죽음에 관하여 / 팀 켈러 / 두란노

by 현명소명아빠 2021. 3. 2.
죽음에 관하여
팀 켈러 / 두란노

http://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16588452

 

죽음에 관하여

삶의 지축을 흔드는 지각변동의 순간들,생의 주권자 앞에 멈추어 서다마음의 기초를 세우는팀 켈러의 기독교 인생관 3부작많은 경우 사람들이 결정적으로 그리스도를 믿게 되는 계기는 결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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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이란 주제만큼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랜 화두가 또 있을까 싶습니다.

어떤 문명은 죽음이 두려움의 대상이 아닌, 친숙한 대상으로 묘사하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분명한 것은 죽음은 아무리 경험해도 익숙해지지 않는 경험이란 것입니다.

 

또한 '죽음'은 더이상 '공평'이란 단어가 성립하지 않는 이 시대에 유일하게 모든 인류에게 공평하게 적용되는 마지막 개념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팀 켈러는 이토록 난해한 주제인 죽음에 관하여, 신앙인이 가져야 할 관점에 대해 이야기를 풀어갑니다.


죽음은 모든 것의 끝이 있음을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누군가가 죽음으로써, 영원할 것만 같던 관계가 결국은 깨어지고 말겠지요. 그런 유한한 관계가 아닌, 죽음으로도 끊어지지 않는 관계를 하나님께선 이야기하십니다.

죽음을 통해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가 너의 안전이 아니라면 너는 전혀 안전하지 못하다. 오직 나만이 너에게서 멀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내가 너를 영원한 품에 안으리라. 다른 모든 품은 너를 버리겠으나 나는 결코 너를 버리지 않는다. (p37)

 


'죽음' 혹은 '사망'은 공중권세 잡은 자의 가장 무거운 그리고 무서운 무기입니다. 어느 누구도 그 칼날을 피해내지 못했고, 두려움에 패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한 분.. 그 죽음을 이기신 분이 계십니다. 그리고 그분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대신 이겼다!"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고난과 죽음을 통해 우리 구원의 "창시자"가 되셨다. 헬라어 원어로는 "아르케고스"다 성경학자 윌리엄 레인은 사실 이 단어는 "챔피언"으로 번역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챔피언이란 대리전을 치르는 사람이었다. 다윗과 골리앗은 서로 결투할 때 둘 다 자국 군대의 챔피언으로 출전했다. 대표로 싸운 것이다. 챔피언이 이기면 전군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도 전투에 승리했다. 

예수님이 하신 일이 바로 그것이다. 마땅히 우리가 치러야 할 죗값, 죽음이라는 형벌을 우리 대신 그분이 대표로 치르셨다.
...
히브리서 기자는 2장 14절에 그분이 죽음의 세력을 멸하셨다고 했다. 그분은 우리를 위해 죽으시으로 우리의 형벌을 제하셨고, 믿음으로 그분과 연합하는 모든 사람에게 장래에 부활하리라 보장하셨다. 우리의 위대한 대장이시자 챔피언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망을 물리치셨다. (p38-39)

사망이 쏘는 것은 죄이며, 그 독은 예수님께로 흘러들었다. 그래서 모든 그리스도인에게는 이렇게 죽음에 맞서 승리할 능력이 이미 있다. (p42)

또한 이 책은 '죽음으로 인한 슬픔'에 대해서도 다루고 있습니다. 이미 마이클 부쉬의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의 책 후기에서 다룬 것처럼.. 많은 기독교인들은 말씀으로 위로를 하지만, 실상은 위로가 아닌 상처를 주는 경우가 많습니다. 개인적으로는 가장 슬픔에 잠긴 이들에게 주는 가장 가혹한 상처란 생각에 맘이 많이 아픈 부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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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 마이클 부쉬 / 새물결플러스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것이 많도다 - 상실과 죽음에 대한 기독교적 위로 마이클 부쉬 / 새물결 플러스 http://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6319642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내 아버지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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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가까운 누군가의 죽음을 슬퍼하는 것은 마치 비신앙인이 할만한 짓(?)으로 매도하는 이들도 있어, 누군가가 맘껏 슬퍼하지도 못하도록 아픔을 주는 경우도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이 책에서 가까운 누군가의 죽음을 겪은 이들이 취해야 할 자세에 대해 말하는 것은 "소망을 품고 슬퍼하라"입니다.

데살로니가 전서 4장에 보면 기독교는 본인의 죽음만이 아니라 사랑하는 이들의 죽음과 관련해서도 우리에게 놀라운 자원을 부여한다. 본문에서 바울은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아야"한다고 했다. 이는 이중부정이므로 실제로는 "소망을 품고 슬퍼하라"라는 말이다. 우리의 철전 지원수인 죽음 앞에 극도의 균형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
그리스도인도 사랑하는 사람을 잃으면 마땅히 슬퍼해야 하되 다만 방식이 달라야 한다는 것이다. 
...
바울은 그리스도인도 가슴 깊이 충분히 슬퍼할 수 있고 마땅히 그래야 하지만, 동시에 소망이 공존한다고 말한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p46-47)

 

가까운 누군가의 죽음에 대해 우리가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할까에 대해 단 한분 본을 삼을 분을 찾는다면, 바로 예수님일 겁니다. 그 장면을 저자는 요한복음 11장에 나오는 나사로의 무덤앞의 예수님의 모습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책을 읽으며 저도 더이상 글을 읽어 내려가지 않고 잠시 멈춰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곧... 자신의 명령하심으로 나사로는 살아날 것을 알고 계신 예수님께서 왜 나사로의 죽음으로 인해 우셨냐는 것입니다. 참으로 의문을 가져야 할 부분이라 생각합니다. 그 해답을 아래 본문에서 찾을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은 자신이 곧 큰 기적을 일으켜 죽은 친구를 다시 살리실 것을 훤히 아셨다. 
...
그런데 그분은 울고 슬퍼하고 분노하셨다.
...
죽음이 침입자라서 그렇다. 하나님이 본래 설계하신 세상과 인생에 죽음은 들어 있지 않았다. 
...
그런데 바울이 로마서 8장 18-23절에 설명했듯이, 우리가 하나님을 등지고 스스로 구주와 주님이 되려는 바람에 모든 것이 망가졌다. 
...
전부 훼손되고 변질되고 망가졌으며, 죽음도 그 일부다. 그래서 예수님은 죽음이라는 괴물 앞에 노하여 눈물을 흘리신다. 죽음은 그분이 사랑하시는 창조 세계를 무참히 일그러뜨렸다.

그러므로 '이를 악무는' 극기는 죽음과 슬픔에 잘못 반응하는 것이다.
...
"이제 고인은 주님과 함께 있다. 주님이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니 너무 슬퍼할 필요 없다. 물론 보고 싶기야 하겠지만 고인은 이제 천국에 있다. 무슨 일이든 다 그만한 이유가 있는 법이다."
엄밀한 의미에서 옳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거야 예수님도 다 아셨다. 그분은 나사로가 다시 살아날 것도 아셨고, 이 일이 아버지께서 계획하신 사역의 일환 임도 아셨다. 그런데도 비통하고 분해서 슬퍼하셨다. 왜 그러셨을까? 그것이 죽음이라는 악과 기현상에 내보일 올바른 반응이기 때문이다. (p48-50)

죽음은 본연의 상태가 아니다. 죽음은 비정상이고 아군이 아니며 당연하지도 않다. 결코 생명 순환의 일부가 아니다. 죽으면 다 끝난다. 그러니 슬퍼하고 울라. 성경은 우리에게 울라고 할 뿐만 아니라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고 한다. 우리 앞에 울 일이 많다는 말이다. (p52)

이 책의 교훈이 누군가의 슬픔에 상처주지 말라는 당부로 끝나서는 안될 것입니다. 바로 슬퍼하되 마땅히 품어야 되는 그 '소망'이 무엇인지 분명히 해야지 그 교훈이 갈무리 될 것입니다.

이 소망은 인격적이다 : 우리의 앞날은 추상적 영성만 있는 무형의 비인격적 세계가 아니라 사랑의 관계가
                               지속되고 만물이 회복되는 인격적 미래라 했다.

이 소망은 기쁨으로 충만하다 :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는 것이다.
                                        주님과 얼굴을 직접 마주하여 보며 그분과 온전히 교감을 이룬다는 뜻이다.

이 소망은 확실하다 : 예수님도 자신의 죽음으로 우리 죗값을 다 치르셨으므로 다시 살아나셨다.
                           법과 사망은 더는 그분께 구속력이 없으며, 그분을 믿는다면 우리에게도 마찬가지다.

저자는 죽음에 대하는 성도의 자세에 대해 참 친절하고 자세히 알려주고 있습니다.

슬퍼하되 소망을 품고 있고, 죽음이라는 아픔을 통해 오히려 영원히 변치 않는 소망되시고 대속자 되신 예수님과 그것을 통해 보이는 하나님의 사랑을 성도는 발견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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