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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도서 - 하나님을 알자!/성경상 중요 개념을 짚어봅시다!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 마이클 부쉬 / 새물결플러스

by 현명소명아빠 2021. 2. 22.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것이 많도다 - 상실과 죽음에 대한 기독교적 위로
마이클 부쉬 / 새물결 플러스

http://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6319642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는 예기치 않은 불의의 사고로 또는 스스로 생을 마감했던 이들의 짧았던 생애로 인한 슬픔과 분노, 절망을 당당하게 직면하고, 그 안에서 감사의 조건과

book.naver.com

 

오랜만에 구입하여 읽는 새물결 플러스 책입니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책은 여러 목사님들이 누군가의 죽음 혹은 자신의 자녀의 죽음을 추모하는 예배에서 하셨던 설교를 엮은 책입니다.

 

우리는 누군가가 죽음을 당했을 때 무슨 말로 위로를 하나요?

혹은 나의 가족이나 자녀가 갑작스러운 죽음을 당했을 때 우리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요?

 

이 책이 유익한 것은, 우리가 쉽게 접하지 않지만, 늘 우리가 겪을 '죽음'에 대한 장면들이고, 그에 대한 말씀이기 때문일 겁니다. 잔치 자리는 그 사람의 지위와 재산 정도에 따라 그 모습이 달라질 수 있지만, 죽음 앞에서는 어떤 인간이든 동등함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일 겁니다.


어떤 설교에서는 추도예배임에도 '죽음'에 초점을 맞추지 않음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우리가 믿는 복음이 어떤 가치를 가지는지를 비로소 발견하게 됩니다.

죽음은 우리의 원수입니다. 죽음의 세력 안에 있는 우울증이나 절망, 불안 역시 우리의 원수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승리자이십니다. 이 믿음 안에서 우리는 삶을 살아내고 죽음을 맞이하며, 이 믿음 안에서 사랑하는 사람들을 하나님의 돌보심 안에 맡겨드리는 것입니다.                                                        (p46) 

죽음 앞에서... 가장 낙심하고 절망하는 그 순간에 오히려 소망을 이야기하는 설교가 있습니다. 그리고 가장 어두운 곳에서 한 줌 빛이 찬란한 것처럼, 인생의 가장 어두운 순간에서야 그 소망의 빛이 얼마나 밝고 따듯한 위로를 주는지 비로소 발견하게 됩니다.

이 시간, 제가 정말로 드리고 싶은 말씀은, 여러분들이 하나님이 일하시는 이 세 가지 방식 모두를 비전으로 삼으실 수 있다면 여러분은 절대로 실망치 않으시리라는 것입니다. 인생의 가장 어렵고 힘든 때에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이 큰 비밀이 여러분의 삶의 일부분이 될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하나님이 기적을 행하실 때 거기에는 합당한 이유가 있다고, 즉 기적에 대한 하나님의 자유를 인정하는 동시에 그 기적만이 문제의 유일한 해결책은 아니라고 주장할 수 있다면, 그리고 여러분이 여러분을 향해 함께 힘을 모으자고 부르시는 그분의 음성에 민감할 수 있다면, 그리고 여러분이 그저 쓰러지지 않고 서있을 수 있는 은혜에 만족할 수 있다면 여러분은 결코 낙심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이 말씀에 여러분의 인생을 거십시오! 아멘.                                                                                                                       (p78-79)


믿음의 최고봉은 신뢰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것은 무슨 일이 일어나든지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의 손길 안에 있음을 믿는다는 뜻입니다. 믿음은 도무지 설명이 되지 않는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믿음이 있다는 것은 설령 비극적인 사건이 일어난다 하더라도 여전히 하나님을 바라는 것입니다.

소망의 극치는 확신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소망을 가진다는 것은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의 손길 안에 거하고 있다는 확신을 갖는다는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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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에서 가르치는 믿음은 재난을 쫓는 부적 같은 것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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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는 우리들의 삶에는 아픔과 비극들이 실제로 존재한다고 가르치며 동시에 이 비극과 고통의 끝에는 그것에 대한 설명이 있을 거라는 것과 그 피해자들이 하나님의 손 안에서 안전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사랑의 극치는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도 아니요, 인간 서로를 향한 사랑도 아닌,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은 곧 하나님의 사랑이 모든 것을 이길 것이며 그 사랑이 언제나 우리 곁에 계신다는 사실을 믿는다는 뜻입니다.                                                                                       (p94-95)


제가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댁의 아드님이 사고를 이겨내지 못했습니다" 같은 소식을 여러분이 듣게 될 때 여러분에게 남아있는 유일한 것은 믿음 말고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제가 믿음으로 말씀드립니다. "제가 그 밑바닥을 경험해봤습니다. 괜찮습니다." 믿음은 영원합니다.                                                          (p107)

우리는 위로를 한다고 하면서 오히려 상대방의 마음에 큰 상처를 남길 때가 있습니다. 이 설교를 통해 우리는 큰 낙심한 이에게 전할 참된 위로가 무엇인지를 배우게 됩니다.

누군가가 세상을 떠났을 때 절대로 입 밖에 내지 말아야 할 말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어딘가 있겠지요"라는 말입니다. 이런 말을 할 만큼 우리는 알고 있는 게 거의 없는 존재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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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앞서 홍수처럼 밀려들어왔던 위로의 편지들에 대해 언급했습니다. 그 가운데 최고이자 동시에 최악의 편지들은 바로 동료 목사들에게서 온 것이었습니다.  저 역시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같은 말씀을 비롯해 이런 상황에 "정확히" 맞는 성구들을 알고 있습니다. 제 믿음은 그들이 걱정하는 것처럼 그렇게 연약하지도 않고 그 말씀이 진리라는 것을 확실히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모두 진리이고 참되지만 슬픔은 그 진리를 비현실적으로 만듭니다. 슬픔의 실체는 하나님의 부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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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큰 비극에 처한 사람에게는 잘 준비된 말보다는 그저 아무 말 없이 손 한번 잡아주는 것이 가장 적당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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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를 고통스럽게 했던 것은 제 상황에 "정확히" 맞는 성구를 인용하며 자신들도 감당하기 힘든 아픔을 어떻게든 종교적으로 미화시켜 보려고 했던 동료 목사들을 대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 니이 그러하시듯 성경은 자신을 보호하는 데 쓰는 방패막이 같은 게 아닙니다. 성경은 뒤에서 우리를 그저 한없이 지지하는 든든한 받침대 같은 것입니다.                                                                                                                 (p86-87)


"울지 마라! 세상을 일찍 떠난 아이들은 이 세상에서의 어려움과 유혹들에게서 구출받고 먼저 천국으로 간 것이다. 이런 식의 위로는 종종 천국을 여러 가지 다복스러운 이미지를 생각하고 그곳의 긍정적인 부분을 극단적으로 강조할 때 생기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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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 길은 슐라이어마허에게 아무런 위로가 되지 못했습니다. 그는 이 세상이 천국은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이 세상이 갖고 있는 긍정적인 부분 또한 잘 알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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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 사람의 설교에서 배제된 두 번째 막다른 길은 "하나님의 뜻이 있겠지"라는 위로의 말이었습니다. 어떤 일이든 우리는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이고 체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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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는 하나님을 비인격적인 어떤 힘이라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기독교의 하나님은 힘 그 이상의 존재입니다. 그분은 사랑이십니다. 그러므로 운명의 힘 앞에 체념하는 것은 기독교적이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자신을 체념해야 할 때는 사랑 앞에서 입니다.                                                                                (p166-168)

마지막으로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은 이겨내야 할 대상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슬픔을 해결해 내는 길은 과정입니다. 시간이 모든 것입니다. 어떤 시점에 적절하지 않았던 것이 다른 시점에선 생명줄이 될 수도 있습니다. 상실의 고통을 겪게 되는 사람은 처음에 그 아픔을 솔직히 인정하고 마음 깊이 느끼는 일이 필요합니다

이 과정을 겪지 않고는 아무도 슬픔의 문제를 제대로 해결할 수 없습니다. 죽음이란 경험은 하나님의 부재와 다를 바가 없다는 사실을 정직하게 인정해야 합니다. 그것을 부인하는 것은 경건한 거짓말에 불과하며 이것은 누구의 말도 들을 수 없게 합니다.                                                                                           (p173-174)

죽음은 여러 번 반복해서 겪어도 결코 익숙해지지 않는 무언가 인 거 같습니다. 그러나 죽음 앞에서만이 우리는 진정으로 겸손할 수 있으며,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던 모든 것이 당연해지지 않는 순간이 되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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