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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도서 - 세상을 알자!/같은 세상을 사는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

최전방의 시간을 찍는 여자 / 린지 아다리오 / 문학동네

by 현명소명아빠 2020. 11. 25.
최전방의 시간을 찍는 여자 - 여성 종군기자 린지 아다리오의 사랑과 전쟁
린지 아다리오 / 문학동네

여행의 가장 큰 묘미는 무엇일까요?

저에게 있어 지금은 너무나도 그립고 소중했던 기억인.. 다른 나라로 떠났던 그 여행의 시간들이 소중했던 이유는 '일상의 일탈'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저희 가족 여행이 소중했던 이유는 남들처럼 좋은 호텔(좀 더 자세히 말하자면 호텔에 묵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었지요)에 묵는 편안함도 아니었고, 훌륭한 뷔페도 아니었습니다. 그보다는 아직 어린아이들조차 각자의 배낭을 메고, 공항과 좁은 비행기에서 찌그러져 잠들고, 작열하는 태양 아래서 아지랑이를 몸으로 맞으며 시골길을 걷는 장면이 더 많았지요. 그런 시간을 보내고 나면, 매일 보던 장면, 일상에 고정되었던 나의 시선이 더 넓어져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내가 불평했던 일상이 얼마나 값지고 소중한지를 알게 되는 것이죠. 

 

이 책을 통해서 저는 그런 여행보다 더 소중한 경험을 하게 되었는데요. 평생을 가도 경험하기 어려운 그런 극한의 시간과 장소를 누볐던 한 종군 기자의 삶을 간접적으로 누릴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자의 경험만큼이나 그 경험속 긴박함과 저자가 느꼈던 갈등과 겪었던 위험의 순간들 속의 그 느낌들이 유려한 필체로 잘 전달된 책입니다.

나는 어깨 위에 거대한 카메라를 올린 채 촬영하고 있는 키가 크고 훤칠한 TV카메라맨 옆에서 사진을 찍고 있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가슴이 철렁 내려앉으며 도망가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나는 엘리자베스가 기다리고 있는 차로 달려간 뒤 차문을 잡아당겼다. 문은 쾅 소리를 내며 닫혔고 바로 쿵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뒤쪽에서 엄청난 폭발음이 일어나며 우리가 탄 차의 앞쪽 도로를 날려버렸다. 자욱한 연기 사이로 파편이 창문 위에 내려앉았다. 박격포 공격인가? 운전사는 즉시 차를 출발시켜 현장을 떴다. 차 뒤쪽에는 검은색 연기와 우리를 향해 불어오는 짙은 회색의 모래바람 밖에 보이지 않았다.
"가! 가! 가! 어서 여기를 뜨자고! 얼른 갑시다!" 엘리자베스가 소리를 질렀다. (p162)

나는 고개를 아래로 숙이고 그의 손길과 말을 무시했다.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이 사람 뭐라고 하는 거야. 앤서니?"
앤서니는 잠시 뜸을 들이더니 이렇게 대답했다. "네가 오늘밤 죽을 거라고 말하고 있어."
나는 망연자실했다. 오늘 아침에 납치되는 순간부터 십중팔구 죽을 운명이라고 체념했고 그 이후에는 살아 있는 일분일초가 마치 선물같이 느껴졌다. 나는 지금 이 순간과 살아남는 데 집중했고, 감정에 휘둘리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p388)

 

이 책의 가치는 단순히 긴박한 순간을 누볐던 종군기자의 삶을 간접적으로 체험할 수 있는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우리에게 친숙하지 않고, 잘 알지 못하는 중동의 문화와 그들의 모습 또한 발견할 수 있었는데요. 특히 남녀 차별이 심하다는 생각 이면에 여성과 아이에 대한 배려가 강한 또 다른 면과 그들이 손님을 대접하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 지를 잘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나는 계속해서 사진을 찍는 데 집중했다. 남자들은 자기들끼리 귓속말을 주고받더니 할림까지 합세하여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마침내 무언가 결정이 내려진 모양이었다.
...
할림이 말했다. "부인. 여기 군인들이 부인이 베일 때문에 차를 마시지 못한다고 걱정합니다. 차를 꼭 마셨으면 한다고요." 속삭임은 계속되었고, 나는 도저히 웃음을 숨길 수가 없었다. 이슬람 문화권에서는 손님을 성대하게 접대하는 전통이 워낙 깊게 뿌리박힌 탓에 이슬람교도였던 병사들은 내가 차를 한 모금도 마시지 않는 이 상황을 도저히 참을 수 없었던 것이다.
할림이 아이디어를 냈다. "이러면 어떨까요? 우리에게서 등을 돌리고 방 한쪽 모퉁이에 서서, 벽을 보고 베일을 걷은 다음 차를 마시면 되지요. 차를 다 마시고 베일을 다시 쓰고요" (p345)

이슬람 문화권에서 여성과 아이들은 늘 안전하게 보호받는다. 임산부는 그보다 더 우선적으로 존중받는다. 가자지구의 임산부라면 당연히 이렇게 광란하는 군중 사이에 자발적으로 끼어들지도 않겠지만 말이다. 바보 같은 내 행동을 탄식하기에는 이미 너무 늦은 듯했다. 그 순간 불현듯 한 가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나는 하늘 위로 두 팔을 들어 올리고 "아기!!!!"라고 소리를 지르고는 양쪽 집게손가락으로 불룩 튀어나온 내 배를 가리켰다. "아기!!!!" 나는 다시 한번 소리 지르며 아래쪽 복부를 가리켰다.
순간 홍해가 갈라지듯이 군중이 둘로 나뉘었다. 내 주변에 있던 남자들은 모두 잠시 멈칫했고, 바로 옆에 있던 남자가 내 얼굴을 바라보고 배를 내려다보더니 본능적으로 내 주위를 둘러싸면서 군중으로부터 나를 보호해 주었다. (p442)

 

그리고 저자는 종군기자이기도 하지만, 서구권에서 살아가는 한 명의 여성으로서 자신이 누리는 것들에 대한 소중함, 그리고 임신한 후에는 임신과 출산으로 인해 경력단절에 대한 부분을 걱정하는 한 사람으로서의 솔직한 고민의 모습도 여과 없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또 다른 여성은 이렇게 말했다. "부르카를 쓰는 것은 문제가 아닙니다. 일을 할 수 없다는 것이 문제죠."
이 여성들이 하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나를 놀라게 했다. 일할 수 없는 것이나 교육받을 수 없는 것 등 아프가니스탄 여성들이 받은 그 모든 억압을 고려하고서야 그들의 가장 큰 불만이 부르카를 입은 것라고 생각했던 내가 지나치게 순진했음을 깨달았다.
...
미국 여성인 나는 일을 하고, 결정을 내리고, 독립적으로 행동하고, 남자와 연애하고, 스스로를 섹시하다고 느끼고, 사랑에 빠지고, 사랑을 끝내고, 여행하는 등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었지만, 너무나 많은 것을 누린 나머지 감사하는 마음을 잊고 있었다. 나는 고작 스물여섯 살밖에 되지 않았지만 평생 동안 새로운 경험을 하며 살아왔던 것이다. (p102)

콩고든, 다르푸르든, 아니면 아프가니스탄이나 다른 곳이든, 새로운 일을 맡을 때마다 나는 교육을 받은 독립적인 여성이라는 사실에 더욱 감사함을 느꼈다. 또한 서른 한살이 되자 사랑하고 싶은 사람과 하고 싶은 일을 선택할 수 있다는 점을 소중히 여겼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자기 삶에서 탈출할 수 있는 해방구가 없었으나 나에게는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힘들 때 훌쩍 집을 떠나 세계 여러 곳을 여행할 수 있는 특권이 있었다. (p268)

나는 계속해서 빈번하게 취재여행을 다녔지만, 집이라는 개념은 더욱 중요해졌고 나의 균형감각에 꼭 필요한 요소가 되었다. (p269)

"아, 고마워. 늦게 말해서 미안해... 임신했다고 알리는 게 좀 힘들었어."
"다시 한번 분명하게 밝혀둘게. 나는 네가 사진을 그만 찍겠다고 말할 때까지 일거리를 줄 거고, 아기가 태어난 후에 다시 일을 시작할 준비가 되었다고 말하는 날부터 또 일거리를 줄 거야. 
...
나느 그의 반응에 충격을 받았다. 현재 활동하는 사진기자들 중에서 아이를 둔 여성은 거의 찾아보기 힘들었으므로 나는 동료들이 내 임신소식을 듣는 순간 내 이름을 리스트에서 빼버릴 것이라고 생각했다.
...
임신기간 내내, 나는 출산과 함께 편집자들이 나를 사진기자 명단에서 제외하고, '엄마'에게는 너무나 험하거나 위험한 일이라는 이유로 내가 그토록 열심히 노력해서 얻어냈던 일거리들을 빼앗아가지 않을까 두려워했다.
(p438-439)

 

마지막으로, 현재 코로나19로 인해 전 세계가 마비되고 전혀 다른 시대를 산다고 하지만, 이미 그 이전에도 충분히 비극적인 삶을 사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지를 다시금 되새길 수 있는 소중한 책이기도 했습니다.

군인들은 권력을 강화하는 방식의 일환으로 영역 표시를 하고, 가족의 유대를 끊어놓으며, 민간인들을 협박하기 위해 여자들을 강간했다.(강간당한 여성은 가족으로부터 배척당하는 경우가 많다.) 강간범들은 집당 강간을 자행하고 무기를 사용하여 피해자의 국부에 상처를 냈다. 체내가 손상된 피해자들은 결국 대변과 소변이 새는 누공에 시달려야 했다. 또한 피해자 가족들에게 억지로 강간 장면을 지켜보게 했다. 도저히 참을 수가 없는 끔찍한 이야기들이었다. (p259)

그다음 주에 나는 여성병원과 소련군의 폭격 피해를 받은 마을을 방문했고, 거리에서 구걸하는 과부들을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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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종일 쭈그리고 앉아 구걸하는 과부들 앞에서 차를 멈춰 세우자 그들은 나에게 돈이 있다고 생각했는지 우르르 일어나 차창 쪽으로 몰려들었다. 먼지와 가난 때문에 그들의 푸른색 부르카는 우중충한 회색으로 퇴색되어 있었다. (p101)

다르푸르에서 국경을 넘어온 수많은 난민들이 머물고 있는 바하이라는 시골마을로 출발했다. 
...
바하이로 향하는 도중에 나는 이쪽부터 저쪽까지 모래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이 수평선을 따라 이동하는 것이 난민들에게 얼마나 가혹한 일인지 깨달았다. 가끔씩 최소한의 그늘을 제공해줄 정도의 관목이 있거나 임시 텐트가 세워져 있으면 극도로 쇠약하고 영양실조 상태가 된 해골 같은 사람들이 눈에 공포가 가득 서린 채 모여 있었다. 난민캠프에 막 도착한 사람들은 햇빛을 가리기 위해 누더기를 걸쳐놓은 앙상하고 키 작은 나무 아래에 자리를 잡았다. 굶주림과 갈증에 지친 그들은 구걸하거나 움직일 힘조차 없어 보였다. (p240) 

 

이 책을 읽으며 언젠가부터 '정보를 얻기 위한 수단으로써 책을 참 오래도록 읽어왔었구나..'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이 책을 읽으며 예전 어릴적 소설을 읽으며 내가 그 주인공이 된 것처럼 가슴 뛰는 손길로 책장을 넘기고, 주인공과 함께 모험하던 제 어린 시절이 떠올랐습니다.

책의 가장 큰 유익 중 하나는 '누군가에게 이입되어 전혀 다른 세상에서 전혀 다른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임을 다시금 되새기게 된 좋은책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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