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김집사 어디가~ 시즌2

[시즌2 #44] 교회 열심히 다녀도 우상숭배 할 수 있나요? (feat. 올바른 기도와 간구)

by 현명소명아빠 2021. 10. 29.
김집사 어디가 시즌2 #44
교회 열심히 다녀도 우상숭배 할 수 있나요? (feat. 올바른 기도와 간구)

 

**이 글은 교회를 다니면서도 점집에 점을 보러 가거나, 현대 사회의 새로운 우상의 대상인 돈을 섬기는 기독교인에 대한 글은 아닙니다^^

 

교회 안과 밖 모두에서 공통으로 쓰는 용어(?)가 있습니다. 소위 신앙에 열심인 기독교인을 지칭하여 '교회 열심히 다닌다!'라고 표현합니다. 김집사도 이런 소리 좀 듣고 다닙니다. 에헴!! 그런데 제목이 좀 맞지 않습니다.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이 우상 숭배를 할 수 있는지를 묻는 제목이라면 충분히 이상할 만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교회를 열심히 다니고, 기도를 열심히 하는데도 우상 숭배할 수 있을까요?

 

대답은 '네'입니다.


왜 이 대답이 이토록 자신 있게 나왔는지를 알아보기 앞서, 기독교와 다른 종교 간의 차이를 먼저 알아봤으면 합니다.

(김집사의 주관적 기준에 의거한 개인적 사견입니다. ^^)

  기독교 다른 종교
신앙 생활의목적 하나님께 영광 나의 바람 성취
목적을 위한 방법 값 없는 은혜 나의 노력(구도, 물질 봉헌 등)
신앙 생활의 형태 교제 숭배

 

기독교는 그 목적이 나 자신에게 있지 않습니다. 나를 만드시고, 선택하시고, 구원하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이 땅에 그분의 뜻을 전하고 이루며 살아가는 것에 있습니다. 그에 반해 일반적인 종교에서는 나의 바람 성취가 주된 목적입니다. 복채를 들고 점집에 가거나, 수험생 자녀를 위해 치성을 드리는 것 모두 자신의 바람을 성취하기 위한 목적으로 행해지는 모습이라 할 것입니다. 물론 모든 종교를 이 잣대로 일반화할 순 없겠지만요.

 

여기까지 읽으신 분이라면 누구나 한 가지 반론을 제기할 거 같은데요.

 

"교회에서도 수험생을 위한 특별 새벽기도회 하던데요?"

 

네 맞습니다. 거의 대부분의 교회에서 수능시험을 앞두고 수험생을 위한 기도회를 보통 하곤 합니다. 그리고 어떤 의미에선 그 반론이 일견 타당하기도 합니다. 냉정하게 보자면 그 기도의 대상은 다르지만, 기도의 목적은 유사하기 때문입니다. 그럼 수험생 자녀를 위해서 기도하거나 자녀나 가족이 큰 일을 앞두고 있을 때 기도하는 것은 다 틀린 걸까요?

 

이 부분에 대한 명확한 해답은 당연히 성경에서 찾아야 할 거 같습니다. 그리고 그 해답을 찾기 위해선 먼저 올바른 그리고 적합한 질문을 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기도와 간구가 바람직할까요?'


 

그 질문과 해답을 위해 우리는 마태복음 6장에 나온 예수님의 가르침을 보고자 합니다.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마태복음 6:31-33)

성경의 가르침은 이미 아버지 하나님께선 우리가 무슨 고민이 있고, 무슨 필요가 있는지 다 아신다는 것이죠. 그러니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하는 것처럼 그런 것을 위해서 기도와 간구를 하지 말고,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의를 먼저 구하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구하지 아니한 것 그러나 아버지 하나님께서 이미 아시는 것을 우리에게 필요를 따라 채우시겠다는 말씀이신 거죠.

 

자녀나 가족 구성원 혹은 지인의 어려움을 두고 기도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그 기도가 나의 욕심을 채우기 위한 기도가 되어선 우상숭배가 되어 버리는 것이겠지요. 마치 자판기에 돈을 넣고 음료수를 뽑듯, 기도라는 코인을 넣고 응답이 튀어나오길 바라듯 말이죠. 

 

우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가 나의 기도의 대상을 통해 이뤄지고 성취되길 기도해야 합니다.

'내가 금식했으니, 내가 40일 새벽기도라는 노력을 했으니, 그 노력이 가상했다면 내 기도 들어주세요'란 심보는 곤란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나의 노력으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과 인도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을 혼동한다면, 그 모든 신앙적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우상숭배가 될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다음 구절에서 예수님은 우리가 걱정 근심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에 대해 덧붙여 이야기하십니다.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날로 족하니라

Therefore do not worry about tomorrow, for tomorrow will worry about itself. Each day has enough trouble of its own.

'내일 일을 위해서 염려하지 말아라, '걱정'은 네가 할 일이 아니라 '내일 | Tomorrow'이 직접 하도록 놔두렴'

 

이 말씀을 다시금 기억해 봅니다. 내일 일은 나의 몫이 아닙니다!!


한 가지 더.. 앞서 표에서 신앙생활의 형태에서 기독교는 '교제', 타 종교는 '숭배'라 표현합니다. 점집에 가보진 못했지만, 영화나 드라마에서 우리는 점집에서 용한 점장이가 어떻게 자신에게 나아온 사람들을 대하는지 잘 알 수 있습니다. 반말과 높은 톤의 음색 그리고 날카롭거나 무시무시한 눈빛으로 제압해 버리지요. 그럼으로써 자신에 대한 두려움 혹은 숭배를 종용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지 않으십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요한계시록 3:20)

하염없이 두드리고 계십니다. 마귀와 같이 나의 동의 없이 마음대로 문을 열어젖히듯 하지 않으십니다. 왜냐면, 하나님께선 우리와 교제하길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제가 가장 좋아하는 성경 장인 요한복음 17장 말씀을 한 번 보겠습니다.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그들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 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그들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 (요한복음 17:21-24)

잡히시기 전 예수님께서 하나님께 구하는 기도는 예수님께서 아버지 하나님과 함께 하셨고, 누리셨던 그 교제 안에 우리를 초대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기도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기도를 참 많이 합니다. 새벽기도, 금요 기도, 수요 기도 등등 말이죠. 이런 시간을 통해 하나님께 기도하러 나아가는 모습은 참 귀합니다. 교회에서도 '기도'를 참 많이 강조합니다. 그런데 어떤 기도를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강조하는 빈도만큼 가르치지는 않는 거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주기도문에서 가르쳐 주신 것처럼 우리는 우리의 필요를 마땅히 기도로 구해야 합니다. 아버지 하나님께선 이미 다 알고 계시지만, 우리가 기도하길 원하시죠. 왜냐면 그 기도를 통해 우리가 하나님 안에,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는 깊은 사랑의 교제로 나오길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