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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도서 - 세상을 알자!/재미는 좀 없지만 필독!

공정하다는 착각 / 마이클 샌델 / 와이즈베리

by 현명소명아빠 2021. 3. 6.
공정하다는 착각 - 능력주의는 모두에게 같은 기회를 제공하는가?
마이클 샌델 / 와이즈베리

http://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16894345

 

공정하다는 착각

마이클 샌델, 10여 년 만에 던지는 충격적 화두!“지금 서 있는 그 자리, 정말 당신의 능력 때문인가?”마이클 샌델 10여 년 만의 신간, 《공정하다는 착각》 출간!샌델, 기울어진 사회구조 이면에

book.naver.com

'정의란 무엇인가'로 이미 한국에서는 유명한 마이클 샌델 하버드대 교수는 사회의 '공정'의 문제를 화두로 새로운 책으로 주목받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최근에 KBS '시사기획 창'이란 프로그램에서 원격 대담을 하는 것을 보면서 더 흥미를 갖고 책을 찾아보게 되었습니다.


샌델 교수는 일명 '능력주의'로 명명되고 포장된 사회의 불공정한 시스템에 대해 의문을 던지고, 반기를 들고 있습니다. 참으로 공평하고, 합리적으로 보이는 '능력주의'의 폐해가 얼마나 심하고, 사회의 약자들이 그 폐해를 고스란히 감당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골자로 문제제기를 하며, 그 '능력주의'가 왜 문제이며, 그 대안은 무엇인지도 함께 생각해 보는 책입니다.


미국은 흔히 '아메리칸 드림'이란 구호 아래, 누구든지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다고 사람들을 믿게 만들어 오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런 기회의 나라인 때도 분명히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성공은 능력의 정당한 대가'란 논리로 성공한 이들에 대한 당위성을 부여하는 동시에, 사회적 약자에 대한 경멸과 무시를 서슴지 않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비단, 미국만의 문제는 아닌 전 세계적 추세이자 문제이지만, 미국의 예로 이야기를 풀어가고 있기에 살펴봅니다.

 

읽으면서 참 아이러니한 것은 우리로 말하자면 좌파격인 '민주당' 즉 자유주의와 사회적, 경제적 평등을 옹호하고, 복지 국가를 지향하는 그 '민주당'에서 능력주의 깃발을 치켜올렸다는 점입니다. 공화당(일명 부자의 공화당) 쪽이 아닌 민주당(노동자의 민주당) 쪽에서 말이죠. 그러나 모두가 알고 있듯이 서민과 노동자의 편으로 인식되어오던 민주당이 주로 강조해온 '능력주의'로 인해 오늘날 경제적 상황이 곧 사회적 지위를 의미하고, 교육을 통한 계층 이동은 더 이상 예전 같지 않고 실질적으로 거의 닫혀있는 시대를 살게 되어버렸습니다.

 

'능력주의'로 인해 최근 수십 년 동안 불평등은 폭발적으로 증가하였고, 사회적 상승을 가속화시키기는 커녕, 반대로 상류층이 그 지위를 대물림해줄 힘만 키워주고 말았습니다. 미국 명문대의 대부분은 상류층 자제들이 다니는 곳이 되어버렸고, 저소득층이나 소외계층을 위한 제도는 유명무실해 진 것이 그 증거입니다. 

 

대학은 더이상더 이상 학문의 전장이 아닌, 직업 선택을 위한 발판이 되어버렸고, 대학을 가지 못한다는 사실은 사회적 성공이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는 의미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리고 우리 나라는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서열화된 고등학교에 진학하지 못하면 노력 여부와 무관하게 원하는 대학 진학조차 어려워진 현실로 치닫고 있습니다.


'능력주의'는 사회적으로 노동에 대한 인식 또한 비틀어 버린듯 합니다. 더 이상 실질적인 '생산'을 담당하고 있는 노동자들이 종사하는 유형의 일들은 기술 혁신과 아우소싱에 따른 일자리 감소와 맞물려 사회적으로 점점 존중의 위치에서 내려오고 있습니다. 반대로 '생산' 능력이 없는 '금융'으로 경제활동의 주도권이 넘어가고, 그들이 잘 알려진 것처럼 말도 안 되는 거액의 인센티브를 받는 직종이 되어버리면서 전통적인 일자리에 대한 존중은 완전히 바닥으로 치닫아 버리게 되었습니다. 

 

또한 능력주의에서는 '능력'의 여부가 곧 그 사람의 실력이자, 등급이 되어버리게 됩니다. 그런데 그 '능력의 성격'은 개개인의 가치와 다양성을 존중해서 나오는 기준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요구하는 극히 일부분에 대한 기준으로 작용하기 때문에 문제가 됩니다. 따라서 그 외의 재능이나 능력은 철저히 무시되고, 그 기준에 도달하지 못하는 이들에 대한 무시는 그들이 달게 받아야 할 책임이 되어버립니다. 그 기준에 부합되는 이들 또한 극한의 경쟁에 내몰리게 됩니다.

 

어떤 이들은 그렇게 반문을 할 것입니다.

"그럼 일하고자 하는 의욕도 없는 이들을 언제까지 복지라는 이름으로 지원해 줘야 합니까?"

"능력도 없는 사람을 고용하여 받는 피해는 어떻게 감수합니까?"

"능력이 존중받지 못하는 사회가 어떻게 발전하겠습니까?"

 

저자는 이런 모든 것을 무시하고 공산주의식 평등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그 능력의 시작점이 이미 '공평'하지 않기 때문에 '능력주의'가 공평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 쉬운 예로, 엄청난 연봉을 받는 농구스타가 농구를 전혀 각광하지 않는 나라에 태어났다면 어떻겠냐는 질문입니다. 혹은 스티브 잡스가 아프리카나 동남아 빈민층의 자녀로 태어났다면... 그렇게 놀라운 혁신을 이룰 수 있었을까 하는 질문에 대한 부분이기도 합니다.


이 책에서 저자가 기독교(더 정확히는 청교도 정신)의 구원과 능력주의의 성공을 비교하며 쓴 부분을 보면서 마무리하려 합니다. 

 

전통적인 기독교적 가르침에서 '구원'의 문제는 '반 능력주의'입니다. 인간의 노력으로 얻어내는 것이 아닌, 철저히 신(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에 의해서가 때문입니다. 루터와 칼뱅이 그렇게 주장했으며, 설사 신자가 열심히 신의 영광을 위해서 산다 할지라도 그것은 은총을 받기 위한 수단으로써가 아님을 가르쳐 왔습니다.

 

쉽게 말해 '운이 좋은' 사람이 있다는 표현으로도 대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기독교인이고, 기독교에서는 대가 지불 없이 받은 이 행운을 '은혜'라고 표현합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운이 좋아서 내가 현재 누리는 것을 얻었다고 믿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무언가 정당한 근거를 끊임없이 찾고, 그 근거를 바탕으로, 현재 내가 누리고 있는 것은 정당하다고 말하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저자는 분명히 말합니다. 당신이 무언가를 누리고 있다면 당신은 '운이 좋아서'였기 때문이라고 말이죠. 그렇기에 운이 좋지 못했던 이들을 긍휼히 여기고 그들과 함께 상생해야 할 책임감을 가져야 하며, 또한 그런 운이 없다 할지라도, 그것은 내가 노력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운이 나빴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통해, 끊임없이 경쟁에 내몰리고, 자신을 탓하는 이들의 마음의 짐이 조금은 덜어지길 바란다고 말이죠.

 

그래서 당신의 능력이란 잣대가 아닌, 당신 그대로의 가치를 회복하길 바란다고 말이죠. 적어도 저는 이 책에서 그런 저자의 간절한 마음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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