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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도서 - 하나님을 알자!/기도와 은사.. 어렵지만 알아야하는 주제

지렁이의 기도 / 김요한 / 새물결플러스 #4

by 현명소명아빠 2019. 10. 19.
  • Main category: 신앙도서 - 하나님을 알자!
  • Subcategory:  기도와 은사.. 어렵지만 알아야 하는 주제
  • 추천 대상:
    • 내 필요만을 아뢰는 기도에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기도를 하고 싶으신 분
    • 세상 속에서 휘둘리는 힘없는 성도가 아닌, 은사를 통해 주의 군사로 살아가고 싶으신 분
    • 내 힘으로 하는 사역에 한계를 느낀 나머지 성령님의 도우심의 필요를 느끼시는 분
    • 기도의 대상이신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분명한 지식을 가지고 기도로 나아가고 싶으신 분
    • 지성과 영성의 균형에 대해 더 알고 싶으신 분

#3에서 기도 응답의 주체에 대해 그리고 기도 응답은 우리의 노력의 정도나 간절함의 정도의 문제가 아닌 하나님의 성품에 기반한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뒤이어 다뤄볼 주제는 기도의 통로이자 아빠 하나님의 영광의 보좌로 가는 유일한 문이신 예수님에 대한 부분입니다. 우리는 기도를 하면서 수없이 주문처럼 그 마지막을 반복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호칭이나 수사가 조금씩 다르긴 하지만 우리의 모든 기도의 마지막은 예수님의 이름으로로 끝납니다. 왜 모든 기도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드리는지에 대해 그 수많은 기도 중에도 생각해 보지 않은 분들이 많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저를 포함해서요. 

 

이제라도 우리의 기도가 왜 예수님을 통해서 드려지고, 드려져야 하는지를 알아보는 시간을 가져보는건 어떨까요?

 

요한복음 14장과 15장에서 예수님께선 직접적으로 예수님의 이름으로 드리는 기도와 간구에 대해 말씀해 주셨는데요.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라.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 (요한복음 14:13-14)

내 이름으로 내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 (요한복음 15:16)

우리의 기도가 응답받는 비결이 우리 자신의 노력이나 성품에 달린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의 신실하심에 달린 문제인 것처럼 우리의 기도가 하늘 아버지께 상달되는 이유는 바로 예수님이 자신의 이름으로 기도할 수 있는 특권을 우리에게 주셨기 때문이다. (본문 p102)

 

이 성경구절을 바탕으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는 것의 의미에 대해 좀 더 깊이 보길 원하는데요. 그 첫걸음은 고대 사회에서 이름이 가지는 의미를 바르게 아는데서 시작합니다. 고대 사회에서 이름은 호칭을 위한 의미만이 아닌 그 존재의 정체성을 뜻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도 모세가 이름을 여쭤보았을때 '스스로 있는 자'라고 답하심으로 당신이 어떤 분이신지를 이름을 통해 드러내셨듯이 예수님의 이름은 이름만이 아닌 예수님의 존재 전부, 예수님 자체를 의미합니다.

 

그분의 사역, 말씀만이 아닌, 삼위일체 하나님중 성자 하나님으로써 창조사역 이래로 우리 인류의 구원을 위해 해 오신 모든 구원의 역사를 믿는다는 뜻입니다. 그분이 우리 죄를 위해 죽으셨고, 부활하심으로 부활의 첫 열매이자 소망이 되셨다는 것을 믿는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이것이 믿어질 때 일어나는 변화에 대해 저자는 아래와 같이 적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사실에 대한 우리의 믿으은 우리 자신과 예수님을 연합시킨다. 성경에서 믿음의 기능은 믿는 자와 믿음의 대상을 하나로 연합시키는 것이다. 그래스 그리스어에서 "믿는다"를 뜻하는 동사 "피 스튜오"는 본래 전치사를 동반하지 않는 단어임에도 불구하고 신약성경에서 항상 전치사 "엔"과 같이 나타난다. 

..(중략)..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과 연합하여 그분 "안에"머물고 있다는 의미가 된다. 이렇듯 예수님에 대한 믿음은 우리와 그분을 하나로 연합시킨다. 그 결과,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자리에 오셔서 대신 형벌을 받으신 것처럼, 또한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자리에 서서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함을 받는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죄를 용서받고 의롭다 함을 얻어 하나님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본문 P105)

 

우리가 예수님과 연합한다는 의미는 또다른 연합에 대한 소망을 우리에게 줍니다. 바로 태초 이전부터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누려오신 그 페리코레스시적 교통과 연합에, 그 사랑과 은혜의 관계 안으로 우리 또한 초대받고 있다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현대인에게 있어 '남의 시선을 의식하는 것'과 '사랑과 신뢰를 잃을까 걱정하는 것' 이 두가지는 참 안 좋은 쪽으로 큰 의미를 가지는 부분인 것 같습니다. 많은 정신과 전문의나 상담사분들은 이것에 대해 자존감이란 키워드로 설명하고 있고 상당 부분 공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자존감은 어떻게 결정되어 지는 것일까요?

 

저는 정신과 전문의도 상담전문가도 아니지만, 제가 아이일 때와 또한 지금 아이들을 키우는 부모의 입장에서 경험한 부분을 토대로 적어보자면, 바로 '사랑' 그리고 '사랑받은 기억'이 자존감을 좌우하는 중요한 부분인 거 같습니다.

 

나의 행동의 결과나 나의 어떤 좋은 부분으로 얻는 반응이나 사랑은 자존감을 세우는데 충분치 않습니다. 오히려 사랑을 갈구하는 쪽으로 변질되어 버리기 쉽지요. 나의 현재 '상태'나 나의 행동의 '결과'와 상관없이 주어지는 사랑과 반응이 자존감을 든든히 하는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 생각합니다.

 

그런 사랑과 반응을 받은 아이는 결과의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결과과 상관없이 존재를 사랑해주는 그 사랑을 받고 있기 때문이지요. 삼위일체 하나님께선 영원 전부터 서로를 존중하고 사랑하시고 아름다운 사랑의 관계를 가져오셨고, 그 관계 안으로 예수님을 통해 초대하고 계십니다.

 

내가 아무 소용이 없을때, 별로 도움이 안 될 때, 가진 것도 사회적 지위도 없을 때 나의 존재를 사랑하셔서 불러주신 그 구원의 초대에 내가 믿음으로 반응할 때 그 가득 흘러넘치는 그 사랑 안으로 나도 들어가게 됩니다.

 

남 얘기가 아니라, 바로 저의 이야기 이기에 전 확신하며 말할 수 있습니다.

 

 

이어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한다는 의미는 부활 승천하시어 하나님의 영광 보좌 우편에서 우리를 위해 지금도 끊임없이 중보하고 계심을 신뢰한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계시니 승천하신 이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 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히브리서 4:14-16 / 본문 p107)

 

전 이부분을 이렇게 이해했습니다. 삼성이나 엘지 같은 대기업 회장이 어느 날 갑자기 저에게 찾아와 

 

"전 당신의 어려움을 이해하고 있습니다."

 

라고 얘기한다면 그 말을 신뢰하지 못할 것입니다.

왜냐면 이해한다는 것은 그 처지를 겪어본 이가 아닌 사람은 할 수 없는 말이기 때문이겠지요.

소위 말하는 금수저 가문에서 금수저로 자라온 이가 흙수저의 삶을 이해한다? 저는 절대 아니라고 단언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전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는 것이 위안이 되고, 예수님이 우리의 중보자 되신 다는 것이 힘이 됩니다. 예수님은 저 멀리 천국에서 혼자 고고히 빛나는 영광의 존재가 아니시라, 인간을 너무 사랑하시고 대속하시기 위해 영광의 하나님에서 천하고 아프고 배고프고 힘든 삶을 사는 인간이 되셨습니다. 이땅에 계실 때 집도 없으셨고, 사랑하는 제자에게 배신도 당하셨고, 육체적 고통의 끝을 경험하셨고, 하나님께 버림을 받기도 하셨습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살면서 겪는 어떤 어려움을 예수님 앞에 가져다 놓는다 하더라도 예수님은 100% 공감하고 이해하며 우리를 위해 우리보다 더 우리를 위하는 마음으로 중보 하실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는 것은 예수의 이름의 권능을 신뢰하는 동시에 우리도 그 권세를 행사하며 삶을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땅에 계실 때도 병자를 고치시고, 파도를 잠잠케 하시며, 죄를 용서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부활 승천하셔서 영광은 부좌 우편에서 만유의 주가 되셨고 우주적 권능을 행사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이땅에서 힘없는 성도의 삶을 살고 있다면 다시금 우리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관계 안에 있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권능을 힘입는 기도를 드리고 살고 있는지, 아니면 그 모든 권능이 이미 주어졌음에도 알지 못하고, 찾지 않고, 구하지 않음으로 여전히 부름 받고 대속받기 전의 모습으로 애써 살고 있지는 않는지 말이지요.

 

오늘은 여기까지입니다.

 

#5에서 이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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