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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도서 - 하나님을 알자!/기도와 은사.. 어렵지만 알아야하는 주제

지렁이의 기도 / 김요한 / 새물결플러스 #3

by 현명소명아빠 2019. 10. 18.
  • Main category: 신앙도서 - 하나님을 알자!
  • Subcategory:  기도와 은사.. 어렵지만 알아야 하는 주제
  • 추천 대상:
    • 내 필요만을 아뢰는 기도에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기도를 하고 싶으신 분
    • 세상 속에서 휘둘리는 힘없는 성도가 아닌, 은사를 통해 주의 군사로 살아가고 싶으신 분
    • 내 힘으로 하는 사역에 한계를 느낀 나머지 성령님의 도우심의 필요를 느끼시는 분
    • 기도의 대상이신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분명한 지식을 가지고 기도로 나아가고 싶으신 분
    • 지성과 영성의 균형에 대해 더 알고 싶으신 분

5장 하나님의 명예로 넘어가서 진행하겠습니다.

 

이 부분 또한 기독교 신앙안에서 크게 자리 잡은 오해 혹은 잘못된 상식(?)에 대한 부분이어서 꼭 짚고 넘어가고 싶었던 부분인데요. 바로 '간절한 기도'에 대한 부분입니다.

 

우리 민족적 정서면에서도 이 부분은 그렇게 낯설지 않습니다. 정화수를 떠 놓고 지극정성으로 기도하는 조상님들의 모습을 쉽게 떠올릴 수 있을 만큼 정성 어린 기도는 하늘을 감동시킨다 라는 것은 오랜 기간 전해 내려오는 상식이랄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요?

 

이 책에선 단호히 아니라고 말합니다.

기도응답의 비결은 '나의 00'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품'에 기반하고 있다는 것이죠.

 

이것이 바뀌어 버리면 문제가 생기는데요 그 첫번째가 나의 노력이나 간절함 이 비결이라면 기도응답은 하나님이 드러나는 사건이 아니라 내가 드러나는 사건이 되어 버리게 된다는 것이고, 두 번째가 믿음이 강조될 필요가 없고, 하나님이 설 자리가 없어져 버리게 된다는 것이 또 하나의 문제입니다.

 

그리고 이 오해의 근거(?)가 되고 있는 말씀인 누가복음 11:5-13에 나오는 밤중에 찾아온 손님으로 인해 이웃집에 간청하여 빵을 얻는 사람의 비유가 나옵니다. 이 비유를 언뜻 보면 간절함으로 인해 그 사람의 마음을 바꿔서 원하는 것을 들어주는 것처럼 보입니다. 저도 이 책을 접하기까지는 그리고 중동의 손님 대접 문화와 명예에 대한 그 당시 중동 문화에 대해서 알지 못할 때까지는 같은 생각으로 이 비유를 읽곤 했었습니다.

 

하지만 누가복음 11:5-13은 그런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한밤중에 예고 없이 나타나 음식을 요구한 사람이, 그 음식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염치를 무릅쓰고 간절히 구했기 때문이 아니다. 이것은 인간의 애절함이나 불굴의 정신과 관련한 말씀이 아니라, 중동 지역 특유의 수치와 명예의 문화에 대한 이야기다.

..(중략)..

한밤중에 찾아온 손님에게 해야 할 첫 번째 의무는 신선하고 따듯한 음식을 대접하는 것이었다. 만일 찾아온 손님에게 좋은 음식을 대접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손님을 맞은 사람의 명예가 땅바닥으로 실추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아주 수치스러운 일이다.

..(중략)..

중동의 마을은 주로 씨족 중심 사회였기 때문에, 그 마을에 속한 누군가가 손님을 제대로 접대하지 못해 수치를 당했다는 것은 그 마을 전체의 명예가 걸린 문제였다.

누가복음 11:8절 말씀에서 벗됨으로는 주지 않아도 "그" "간청함"으로 준다고 나오는데 이 용어에 대한 바른 이해 또한 이 비유를 제대로 이해하는데 필수적입니다.

 

여기서 그는 여행객을 맞은 최초의 사람이라고 주로 해석되어 왔지만 현대의 해석자들은 이웃의 부탁으로 잠자리에서 일어나 음식을 나눠준 사람으로 간주합니다.

 

또한 간청함도 끈질긴이나 간절함으로 해석되어 왔으나 그리스어 원뜻으로 보자면 '수치가 없는' 혹은 '수치를 당하지 않는'이란 뜻으로 바꿔 말해 "명예로운"이란 뜻입니다.

 

아직까지도 강경 이슬람 국가에서는 명예살인이라 해서 딸이나 여동생이 이슬람교인이 아닌 사람을 만나거나 종파가 다른 이를 만날 경우 혹은 가족의 명예를 실추시킨 것으로 간주해 아버지나 오빠가 죽일 수 있는 명예살인이 남아 있는 곳이 많다고 알고 있습니다. 이처럼 중동 문화에서는 수치를 당하는 것을 정말 두려워한다는 것이죠. 

 

잠자리에서 굳이 일어나 빵을 나눠준 사람이 그렇게 행동한 이유는 간절함 때문이 아닌, 그가 명예로운 인격과 신실한 성품을 가진 "명예로운 사람"이기 때문이라는 것이죠.

 

우리의 기도에 하나님께서 응답하시는 이유도 같은 맥락으로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시는 이유, 응답 하셔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명예와 직결된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그 예로 본문에서는 갈멜산에서 바알의 사제들과 기도 대결을 한 엘리야를 예로 들고 있습니다. 엘리야의 기도는 간결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이심을 보여주옵소서"

 

여기서 우리는 한가지 분명한 교훈을 얻을 수 있는데요.

흔히 교회 안에서도 기도의 열심만을 가르치지만, 사실 그것보다 더 선행되어야 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바른 지식을 갖고, 그 지식에 근거하여 우리의 믿음이 어떻냐는 것에 달려 있습니다.

 

다른 말로 하나님께서 얼마나 신실하시고, 전능하시고, 전지 하시며, 영광스러운 분이신지를 우리가 말씀을 통해, 책을 통해, 들음을 통해, 삶 속에서 경험을 통해 알아가면 알아갈수록 우리는 더 큰 것에 대해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고, 믿음의 기도를 드릴 수 있다는 것이죠.

 

예전에 친하게 지내던 집사님이 암투병을 시작하시고 나서 매일 아침 출근길에 운전하면서 기도를 드렸었는데요. 하나님께서 그분을 낫게 해주시길 기도하던 중 문득 마음에 의문이 들었습니다.

 

'난 정말 하나님께서 그분의 암을 낫게 해주실 것을 믿으면서 기도하고 있는가?'

 

(자세한 에피소드가 궁금하신 분은 제 네이버 블로그 김집사 어디가 시즌1 #14를 읽어봐 주세요

https://blog.naver.com/felahabe/221025075192)

 

한참을 고민을 해봤지만, 결론을 아니었습니다. 전 믿지 못하고 있었죠. 왜냐하면 감기 정도의 병이 아니었으니까요. 그것이 저에게 나름 큰 충격이었습니다. 믿지도 못하면서 기도를 하다니 말이죠.

 

지금도 고민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제가 믿는 하나님께서 암같은 불치병을 고치실 수 있는 능력의 하나님이 신줄을 제 마음속에 100% 확신하지 못하고 있으니까요. 

그래서 더 말씀을 읽고, 신앙 서적을 읽습니다. 하나님을 더 알아가기 위해서입니다.

삶에서 말씀을 적용해 보고 과감히 정말 이루어지는지 종종 적용 테스트를 해 봅니다. 하나님을 더 경험해 보기 위해서 입니다.

 

언젠가는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를 것을 바라며 오늘도 이 글을 적습니다.

 

#4에서 이어 나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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