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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요약] 최후 심판에서 행위의 역할 논쟁 #2 "그리스도인은 최후의 심판이 아니라 상급 심판에서 각자의 행위에 따라 심판을 받을 것이다" / 로버트 N. 윌킨

by 현명소명아빠 2020. 7. 24.
그리스도인은 최후의 심판이 아니라 상급 심판에서 각자의 행위에 따라 심판을 받을 것이다
로버트 N. 윌킨

첫 번째로 살펴볼 주장은 로버트 N. 윌킨의 "그리스도인은 최후의 심판이 아니라 상급 심판에서 각자의 행위에 따라 심판을 받을 것이다"입니다.

 

저자는 끝까지 견디고 인내하는 것의 중요성에 대해 강조하며 인내가 최종적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 영원한 상을 얻는 조건이라는 증거라고 주장합니다.

 

우선 저자는 인내와 구원이 아닌 믿음과 구원을 요한복음의 구절들을 통해 확실히 하며, 누가복음의 '열므나 비유'를 통해 한 므나 그대로 가져 나온 세 번째 종을 포함하여 구원받은 성도와 귀인을 미워한 원수들에 대해 구별하고 있습니다. 즉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 주인의 책망을 들은 종이라 할지라도 주인의 원수들과 같은 위치로 놓지 않았다는 말이지요. 실제로 누가복음의 구절을 한번 같이 보실까요?

곁에 섰는 자들에게 이르되 그 한 므나를 빼앗아 열 므나 있는 자에게 주라 하니
그들이 이르되 주여 그에게 이미 열 1)므나가 있나이다
주인이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릇 있는 자는 받겠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그리고 내가 왕 됨을 원하지 아니하던 저 원수들을 이리로 끌어다가 내 앞에서 죽이라 하였느니라
(누가복음 19:24 - 27)

여기에서 보는 장면에 대해 저자는 첫 번째 심판(종들에 대한 심판)은 그리스도의 심판대를 가리키고, 두 번째 심판(원수들에 대한 심판)은 크고 흰 보좌 심판을 가리키는 듯하다고 적고 있습니다. 첫 번째 심판에서 신자들은 각자의 행위에 따라 자신들의 상이 결정되는 심판을 받으며(로마서 14:10-12 | 고린도전서 3:5-15, 4:1-5, 9:24-27 | 고린도후서 5:9-10 | 요한일서 4:17-19) 두 번째 심판에서 비신자들은 각자의 행위에 따라 그들의 영원한 고통이 결정되는 심판을 받게 된다고 주장합니다.(요한계시록 20:11-15)


한 줄로 요약하자면 신자와 비신자가 각기 다른 심판대 앞에 서게 되며, 신자는 행위로 인한 상에 대한 그리고 비신자는 심판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구원과 행위는 무관하다"는 것이 로버트 N. 윌킨의 입장입니다.


다만, 신자에게 영생은 선물로 주어지지만, 상은 그렇지 말할 수 없다고 적습니다. 사도 바울에 의한 그리스도인들은 상('브라베이온')을 받기 위해 힘써야 한다(고린도전서 9:24)라고 하는데 이 '브라베이온'이란 단어의 뜻이 "특별한 업적에 대한 포상, 상급"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 값없이 주어지는 선물이지만, 상은 행위와 인내의 결과로 주어지는 것으로 구별해서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말인즉슨 모든 신자가 다 인내하는 것이 아님을 그래서 성경에서 여러 차례 성도의 인내에 대해서 경고하고 당부가 있다고 적습니다. 

 

이 주장에 따라 저자는 열처녀 비유, 달란트 비유에서 인내하지 못한 자들이 받는 심판은 구원과 영벌을 다루는 흰 보좌 심판이 아닌, 그리스도의 심판의 보좌에서 이뤄진다고 주장합니다.


저자는 마지막으로 자신의 구원에 대한 자신의 생각과 그리스도인들이 행위로 인해 최후의 심판대(구원과 영벌에 대한)에 설 것이라는 견해의 문제점을 적습니다. 

 

1. 구원에 대한 저자의 생각

- 영생은 영원하다

- 영생은 오직 믿음으로 얻는다.

- 영생은 행위에 속한 것이 아니다

- 영생은 회심 때 결정된다.

 

2. 그리스도인들이 행위로 인해 최후의 심판대에 설 것이라는 견해의 문제점

- (구원의)확신은 불가능하다 : 최후까지의 인내가 구원의 조건이라면 누구도 자신의 구원을 확신할 수 없다.

- 혼동을 일으키는 복음 전도 :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는 주장이 흔들릴 수 있다.

- 훼손된 동기 :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인내의 동기인가? 두려움이 동기인가?

- 이해할 수 없는 성서 : 예수님께서 모든 죄 짐을 떠안으시고, 죄 값을 십자가를 통해지셨음에도 선한 행위로 인한 짐을 또다시 사람들에게 지운다는 것은 모순이다.

 


저자의 결론을 인용해서 적습니다.

자기 자신이 믿음을 지키고 선을 행하면서 끝까지 인내하리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바울도 자신이 상을 받지 못할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면(고린도전서 9:27), 당연히 우리도 그렇게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하지만 그러한 불확실성은 "상"에 국한된 것일 뿐, 영생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만일 우리가 영생에 대한 약속을 믿는다면 우리는 확신을 가질 수 있다. 그것은 이토록 단순하다. 우리는 이러한 확신을 얻기 위해 우리의 행위에 의존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최후의 심판대 앞에 섰을 때 비로소 내가 구원을 받은 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까 봐 내심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오히려 우리는 예수가 자신을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현재 시제], 심판에 이르지 않고 [미래 시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과거 시제]"(요한복음 5:24)라고 말씀하신 약속을 믿는다. 우리는 이 보장된 구원으로 인해 기뻐한다. 최후의 심판을 두려워하며 살지 말자. 신자들은 결코 거기서 심판을 받지 않을 것이다. (본문 p77)

 

각 저자의 분량 말미에 저자의 주장에 대한 다른 저자들의 논평들도 있으니 함께 살펴보면 좋을 거 같습니다.

다음번엔 최후 심판에서 행위의 역할 논쟁 #3 "행위와 상관없는 칭의와 행위에 의한 칭의" / 토머스 R. 슈라이너의 주장을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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