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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도서 - 하나님을 알자!/유대인의 눈으로 본 기독교

리얼 코셔 예수 / 마이클 L. 브라운 / 이스트윈드 - #4(마지막편)

by 현명소명아빠 2019. 9. 26.
  • Main category: 신앙도서 - 하나님을 알자!
  • Subcategory:  유대인의 눈으로 본 기독교
  • 추천 대상:
    • 모태 기독인의 시선에서 벗어나 나의 신앙을 바라보고 싶은 분
    • 믿으니까 믿는다? 가 아니라 객관적인 증거들로 신앙을 다시 보고 싶은 분
    • 유대 전승 및 토라에 나타난 예수님의 메시아이심에 대한 증거들을 알고 싶은 분

 

이번 #4에서부터는 단락 세번째인 이스라엘의 숨겨진 메시아 편으로부터 시작합니다.

 

단락을 시작하며 저자는

 

유대인들이 예수님은 하나님이다라는 말을 믿을 있는가?’

 

라는 질문을 던집니다. 유대인들도 현재 젊은 세대중에는 무신론자 비율이 워낙 높다보니 일반적인 유대인들에게 던지는 질문이라기 보다는 종교적인 유대인들에게 던지는 질문일 겁니다.

 

질문이 가지는 무게는 일반인들에게 예수님은 하나님입니다라고 던지는 말과는 무게감이 많이 다를 같습니다.

왜냐면 유대인들에게(물론 기독교인에게도)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인간의 모습으로 오셨다, 육신의 형체를 가지셨다라는 말은 그들이 가진 토라에 기반한 전통적인 믿음과 거리가 멀어도 한참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바라보는 시선을 어떻게 가질 것인가에 대해 챕터 서두에서 저자는 명확히 기술하고 있습니다.

 

- 만약 질문이 하나됨 안에 복합성을 갖고 계시고, 하늘의 보좌에 앉아 계시며, 그분의 임재는 세상에 가득하고, 그분의 위엄은 영원하고 무한한 하나님께서, 분이시면서 동시에 우리 가운데 사람의 몸의 장막 안에 그분의 영광을 나타내실 있는가라는 뜻이라면, 대답은 확실히 예이며, 이러한 믿음에는 전혀 우상숭배적인 요소가 없다.

 

..(중략)…

 

이것은 유대인들에게 거의 가치가 없는 어떤 어리석은 종교적 개념이 아니라, ‘ 소프(En Sof), 시작과 끝이 없는 무한하신 하나님께서 친밀한 관계로 우리 가운데 거하시며, 모든 위에 계시면서 동시에 모든 안에 거하시고, 손댈 없으나 만질 있고, 보이지 않으나 있는 것에 대하여 설명하는, 놀랍도록 풍부하고 깊은 영적 개념이다. 미드라시에서인용한 내용을 다시 보면

 

세상이라도 영광을 담을 없지만, 내가 원하면 나는 나의 모든 본질을 하나의 작은 장소에 집중시킬 있다.” (본문 p207-208)

저자는 질문을 바꿔야 한다고 말한다. 주체가 사람이나 문화나 종교가 아닌 무한하고 영원하신 하나님께서 어떻게 자신을 알리셨는가? 로 말이죠.

 

주제에 대해서 우리가 충분한 시간을 들여 이해하려 하지 않는 우리는 매우 혼란한 그리고 상호 배치되는 구절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요한복음 1장 18절, 5 37, 디모데전서 6장 16절에는누구도 하나님을 보지 못했다라고 기술되어 있는데, 예수님은 요한복음 14 9절에서

누구든지 나를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

라고 하십니다.

 

모순된 내용으로 보이는 부분에 대해 유대인적 관점(히브리성경/토라/구약성경)에서 적은 인상적인 구절이 있습니다.

 

- “모세와 아론, 나답과아비후, 70인의 이스라엘 장로들이 (시내산에) 올라가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뵈었다. 그분의 발 아래는 청옥을 깔아 놓은 같았고, 하늘처럼 맑았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에게 손을 대지 않으셨다. 그들은 하나님을 보고, 그들이 먹고 마셨다. -출애굽기 24:9-11 (본문 p210)

 

유대 성경 주석가의 말처럼 환상을 것일까?

아니면 천사를 만난 것을 하나님으로 착각한 것일까?

(실제로 구약성경에는 천사를 만난후 하나님의 영광으로 인해 죽을 것을 두려워한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이에 대해저자는 하나님을 만나 대접한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언급합니다.

창세기 18장에서아브라함이 장막 입구에 앉아 있을때 (히브리어로 야훼)께서 마므레의 상수리나무 옆에 계신 것을보는 장면이 나옵니다.

 

탈무드에선 천사로 적고 있지만 바빌로니아 탈무드 바바메시아에서는 아브라함이 거룩하신 , 그분에게 복이 있기를, 그분이 그의 장막 문에 계신 것을 보았다라고 기록하고 있기도 합니다.

 

이어지는 성경구절에서 세사람중 한사람이 두명의 천사와 함께 아브라함을 방문한 하나님을 있습니다. 그들 사람이 다음 해에 돌아와서 사락 아들을 갖게 하겠다고 약속했고, 사라가 이야기를 들으며 웃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그의 아내가 주께서 다음 해에 은혜를 베푸셔서 그녀를 방문하겠다는 약속을 의심하며 웃었는지를 물으시고, 사라는 웃지 않았다고 그리고 주께서는 다시 너가 웃었다고 대답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어서 창세기 18 22절과 19장을 같이 보면 분명해 집니다. 천사는 맡은 일을 완수하기 위해 소돔으로 향하였고, 주님께서자신이 하시려는 일을 아브라함에게 알리시기 위해 아브라함과 함께 계시는 장면이 분명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 저녁에 천사가 소돔에 도착했고, 롯은 소돔 성문에 앉아 있었다.(NJV성경 / 본문 p213)

 

장면으로 분명히 있는 것은

1.       주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다.

2.       아브라함이 장막 앞에서 세사람을 보았는데 그중 한분이 주님이시다.

3.       그들이 소돔을 향하여 갈때 아브라함이 배웅하였고 주께서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을 아브라함에게 알리셨고 다른 두사람은 계속 소돔으로 나아갔다

4.       아브라함과 대화를 마치신 주님은 떠나셨고 아브라함은 집으로 돌아갔고 천사는 소돔에 도착했다.

5.       주께서 사람의 형태로 나타나셨고 함께 음식을 드셨다.

 

성경 구절은 크게 2가지가 중요한데요.

하나님께선 당신이 원하시면 인간의 모습으로 현현하실 수 있으시고, 이 본문은 유대인들이 부정하는 신약성경이 아닌 토라(모세오경)인 것이라는 부분입니다.

 

사실 이부분에 대해 개인적으로는 다른 책후기인 무신론 기자, 크리스천 과학자에게 따지다.(우종학)”에서 같이 살펴본 내용과 같은 시각을 필요로 한다고 생각합니다.

 

책후기에서도 하나님께서는 기적적인 방법이 아닌 진화라는 방법을 사용하실 있음을 같이 읽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방식을 우리 마음대로 제한하고 재단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선 당신이 원하시는 어떤 방법이든 사용하실 있는 전능자이자 주권자이심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을 다시금 되새기고 싶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시지만 그분께서 원하신다면 인간이란 유한한 그룻에 스스로를 나타내실 수 있으시고,

하나님은 말씀으로 천지 만물을 창조하실 수 있는 전능하신 분이시지만, 그 방법은 그분이 정하실 수 있다는 사실이 우리의 제한되고 갇혀있는 사고를 다시금 전능자의 무한함속에서 자유로워져야 할 부분이 아닌가 합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저자는 구약성경이 아닌 신약성경에서 예수님을 통해 나타내 보이신 성육신 대해 저자는 주제를 이어갑니다. 이 개념을이해하기 위해서 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하는 멤라’(Memra’) 개념을 먼저 알아야 같습니다.

 

 타나크(유대인성경)에서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일부분으로 나타나는 것을 종종 기록하고 있습니다.

 

시편 107 20절에서 그가 그의 말씀을 보내어 그들을 고치시고라고 기록되어 있는 부분에서나 창세기에서 하나님이 말씀으로 창조하셨다라는 것에서 나타나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개념은 히브리어를 모르는 회당의 모임에서 말하고 읽는데 사용되었던 아람어 탈굼에서 확인이 가능하는데 탈굼에서는 사람에게 다가가거나 직접 소통하는 하나님을 가리켜서 하나님이 아닌 그분의 멤라(말씀)으로 표현하곤 합니다.

 

- 다음의 구절에서 위에는 히브리 성경의 본문이 나오고, 그 아래에는탈굼에서 그것을 번역한 내용이 나온다.

 

창세기 1:27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셨다

                주의 말씀이 사람을 창조하셨다(탈굼 슈도-요나단)

 

창세기 15:6 아브람이 주를 믿었다

               아브람이 주이 말씀을 믿었다

 

..(중략)..

 

출애굽기 20:1 주께서 모든 말씀을 하셨다.

                  주의 말씀이 모든 말씀을 하셨다.

 

..(중략)..

 

이사야 45:17 이스라엘은 주에 의하여 구원을 받을 것이다.

                이스라엘은 주의 말씀에 의하여 구원을 받을 것이다.

 

..(중략)..

 

이제 신약성경으로 돌아가서 요한복음 1장을 읽으면서, 요한이 말한 하나님의 말씀을 아람어의 멤라 바꿔보자. 이것은 그분의 일부이며 하나님의 전체는 아니다.

태초에 멤라가 계셨다. 멤라가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멤라는 하나님이었다.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그를 통하여 만물이 만들어졌고, 만들어진 것들은 그가 없이 만들어진 것이 없었다. 그의 안에는 생명이 있었고,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요1:1-4)

(본문 p215-217)

 

이를 통해 확인할 있는 사실은 말씀(멤라)” 표현되는 하나님의 말씀이란 개념은 반유대주의적 개념이 아니란 의미이며, 히브리 성경 많은 곳에서 이미 발견되고 있는 개념인 것입니다. 그리고 요한복음 1:14절에서

 

멤라가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셨다” 구절 또한 반유대주의가 아닌 것이 되는 것입니다.

(저자는 여기서 거하셨다 헬라어 스케노오 뜻은 장막을 치다, 임시로 거주하다 뜻임을 추가로 적고 있습니다. )

 

이스라엘 민족의 광야생활 동안 천지만물에 충만하신 하나님께서 좁은 성막에 자신을 나타내셨던 것처럼, 주께서 우리 가운데 육신을 장막을 치시고 그것을 그분의 영광으로 채우셨지만 여전히 하늘에 하나님으로 계셨다는 개념을 이해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저자는 또한 유대교 핵심 고백인 쉐마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온전한 하나됨에서 사용된 “하나됨”의 에하드란 단어를 사용한 의미를 하나님은 분이며 하나되신 분임을 표현하기 위해서임도 또한 기술하고 있습니다.

감추어진 하나님과 나타나신 하나님에 대한 추가 설명을 위해 “세피롯”과 쉐키나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는데 이부분에 대한 서술은 생략하겠습니다.

 

이어서 저자는 우리가 흔히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이 로마의 압제에서 해방시켜줄 정치적 메시아만을 믿고 기대했다고 생각하는게 전부가 아닌, 고난 받는메시아를 유대교가 믿고 있었다는 것을 유대 고대문헌들의 예를 들며 기술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고난은 고난받는 백성들을 위해 고난을 받는 메시아의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주장은 아래  결론으로 귀결됩니다.

 

고난 받는메시아와 통치하고 다스리는 메시아는 두명이 아닌 멸시를 당한 높여지고, 상함을 받은 영광을 얻는 메시아만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에 대해 본문에선 이사야서와 빌립보서의 내용을 통해 아래와 같이 적고 있습니다.

 

- 진실로 나의 종이 형통하며,

높임을 받고 매우 존귀하게 것이다.

 

그의 모습이 크게 상하여 다른 사람과 같지 않고

그의 모양이 다른 사람보다 심하여

많은 사람들이 그를 보고 크게 놀란 것처럼

 

그가 많은 민족들을 놀라게 것이다.

왕들이 그로 인하여 침묵할 것이니

이는 그들에게 전해지지 않은 것을 그들이 보고

그들이 듣지 못한 것을 알게 것이기 때문이다 이사야 52:13-15, NJB성경

 

..(중략)..

 

그가 사람으로 나타나셨을때에, 그는 순종함으로 자기를 더욱 낮추기를 범죄자로 나무기둥에 달려 죽는 죽음에 이르기까지 하셨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를 지극히 높은 곳으로 높이셨고, 모든 이름 위에 있는 이름을 주셨다. 그리하여 하늘과 위와 아래에서 모든 무릎이 예슈아에게 주신 이름에 경의를 표하여 꿇을 것이며, 모든 혀가 메시아 예슈아를 아도나이() 인정하여 아버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이다. -빌립보서 2:7-11, CJB성경 (본문 p239)

 

고난 받으실 메시아는 곧 통치하고 다스리실 메시아이시다. 시편 기자와 사도 바울은 이 이야기를 전하고 싶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뒤에 이어서 의인의 죽음을 통한 속죄, 제사장 메시아, 선지자 메시아 그리고 왕이신 메시아 내용등이 이어서 나옵니다. 내용이 적지 않아 글에서 일일이 다루지 못하는점 양해 부탁 드립니다.

 

여정을 통하여 저자가 전하고 싶은 내용은 제가 이해하기론 아래와 같습니다.

 

1.       예수님은 메시아이시며 그 메시아적 의미는 왕이자, 제사장이며, 선지자이십니다.

2.       예수님은 성육신으로 이 땅에 하나님 스스로를 나타내셨습니다.

3.       예수 그리스도의 대한 내용은 신약에 갑자기 나온 개념이 아니라 이미 히브리 성경 전체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글에서 저자의 안타까움 마음을 느끼고 있습니다. 같은 동포이며, 선택받은 민족이고, 같은 하나님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많은 내용들을 이미 알고 있음에도 예수님을 메시아로 구원자로 믿지 않고 있는 동포들에 대한 안타까움 이겠지요.

 

우리도 마찬가지일 듯 합니다.

땅의 많은 이들이 하나님도 알고, 예수님도 알지만 믿지를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지 않습니다. 우리 또한 전반에서 흐르고 있는 저자의 안타까움을 가지고 이웃을 향해 복음을 말로 그리고 삶으로 외치는 삶을 살아야 것입니다.

이 책의후기는 여기까지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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