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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도서 - 하나님을 알자!/유대인의 눈으로 본 기독교

리얼 코셔 예수 / 마이클 L. 브라운 / 이스트윈드 - #1

by 현명소명아빠 2019. 9. 19.
  • Main category: 신앙도서 - 하나님을 알자!
  • Subcategory:  유대인의 눈으로 본 기독교
  • 추천 대상:
    • 모태 기독인의 시선에서 벗어나 나의 신앙을 바라보고 싶은 분
    • 믿으니까 믿는다? 가 아니라 객관적인 증거들로 신앙을 다시 보고 싶은 분
    • 유대 전승 및 토라에 나타난 예수님의 메시아이심에 대한 증거들을 알고 싶은 분

이 책은 사실 책장 넘기는 것이 쉽지 않은 책입니다.

많은 유대 전승에 대한 부분, 유대 랍비의 가르침들에 대한 부분들을 내용에 담고 있으며, 다루는 주제 하나하나가 쉽지는 않아 한번에 주욱 읽히는 책은 아닌 것 같습니다.

 

아마도 이 책에 대한 후기도 이 글 한편으로 완결짓지 못하고 3편 이상으로 나눠서 연재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만큼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내용들이 많다는 의미가 되겠지요.

 

이 책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게 된 유대인인 저자가 예수님이 메시아임을 반대하는 많은 유대 학자와 랍비들과 교류하는 중 가장 자주 토론한 사람인 랍비 쉬 물리 보 테크의 책 "코셔 예수" 추천사를 쓰려고 준비하던 중 마음의 감동이 일어 두 달 반도 안 되는 기간에 출간된 책이다. (놀랍지 않은가.. 이 정도의 책을 두 달 반 만에 쓰다니..)

 

사실 이 책의 서론에서도 다루고 있지만 예수님은 "유대인"이셨다.

그분은 주일(일요일)에 교회에 가셔서 예배를 드린 것이 아니라 안식일(샤밧 - 정확히는 금요일 밤부터 토요일 밤까지)에 회당에서 예배를 드리셨다.

그분은 기독교인으로서 이땅에 계셨던 것이 아니라 유대인으로서 이 땅에 사셨다.

그분은 어려서부터 유월절을 가족과 함께 예루살렘에서 보내셨고, 이땅에서의 사역의 마지막 직전에조차도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절기에 따라 만찬을 나누셨다.

 

많은 중세 성화에서 예수님을 흰 피부의 백인으로 그리고 있지만... 사실 그분은 비쩍 마르고 검게 탄 얼굴에 수염이 덥수룩 한 중동인의 얼굴이셨을 것이다.

 

우리가 흔히 머릿속으로 그리는 예수님과는 많이 다르지만... 본래 예수님의 모습을 알아가게 도와주는 책이 바로 이 책이라 생각하고 그것이 이 책의 후기를 남기는 이유입니다.

 

본론으로 들어가 볼까요?

 

이 책은 많은 유대 학자와 교수들이 홀로코스트의 고통스런 경험으로부터 기독교 혐오로 연관 지어지던 모습에서 벗어나 예수를 기독교의 예수에서 유대인 예수로서 되찾고자 하는 노력이 다양하고 많음을 기술하고 있습니다.

 

유의해서 보아야 할 점은 그들이(유대인 랍비, 교수, 철학자) 가지는 기조는

 

1. 예수를 높이 평가하는 것은 강하게 비판한다.

2. 그러나 예수님을 거부하기보다는 그분을 되찾는 것에 더 관심이 있다.

 

이 것은 파격적인 변화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 생애로부터 500년 이내에 기록된 대부분의 초기 랍비의 자료들에서 예수님은 타락한 죄인, 지옥에 떨어질 사기꾼으로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던 모습에서 최근 200년동안 다양한 유대 학계, 종교계에서 예수님에 대한 저서들이 기록되고 그분의 삶을 다시 조망하는 글들이 나오고 있다는 것은 놀라움을 넘어선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글들의 한계이자, 저자가 이 책을 쓰게 된 가장 큰 동기인 부분은

 

"과연 예수는 훌륭한 랍비이자 유대인이였다." 라는 정도의 사실의 회복만으로 충분한가? 하는 질문일 것입니다.

 

저자의 대답은 분명합니다. "충분치 않다."

 

전통적인 유대인의 사상과 시각에서 이정도의 평가만 해도 파격적인 것은 분명하지만 저자는 더 강한 목소리를 내는데 주저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충분치 않은 이유를 거론하기 위해 먼저 짚은 개념이 있는데 예수님은 "랍비" 셨다는 겁니다.

그것도 지금의 랍비의 개념과는 다른 1세기 당시의 랍비셨지요.

 

그것에 대한 이야기는 신약성경에서 쉽게 찾아 볼 수 있고 본문에 아래와 같이 기술되고 있습니다.

 

- "바리새인중에 니고데모(히브리어로 나크디몬)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유대교의 지도자이다.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말했다. '랍비여 우리는 당신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압니다.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요 3:1-2, ESV)

유대교의 지도자, 그것도 바리새인이 예수님을 능력 있는 선생, 하나님이 보내신 사람으로 인정하고, 그를 랍비라 불렀다. 이 호칭은 신약성경에서 예수님에게 총 13번 사용되었다(선생이라는 호칭은 더 많이 사용되었다) 이것은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사실을 말해준다. 우리가 예수님을 1세기 유대 랍비로 인정하지 않는 한 우리는 예수-예슈아가 어떤 분인지 이해할 수 없다." (본문 p66)

 

이어서 저자는 예수님 당시 랍비의 특징들을 아래와 같이 거론합니다.

 

1. 1세기 랍비는 제자들(또는 학생들; 히브리어로 탈미딤)의 무리를 거느렸다.

- 예슈아처럼 돌아다니는 교사들이나 한 곳에 자리를 잡은 교사들은 마음을 다하여 스승에게 헌신하는 (오느날 일부 사이비 종교처럼 아무 생각 없이 하는 것과는 다른) 제자들을 모았다. 그 관계의 본질은 삶의 모든 영역에서의 신뢰였고, 그것의 목표는 탈미드(제자)를 지식과 지혜와 윤리적인 행동에 있어서 그의 랍비와 같은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이것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과 같다. "제자가 그 선생보다, 또는 종이 그 주인보다 높지 못하다. 제자가 그 선생과 같고 종이 그 주인과 같으면 충분하다"(마10:24-25). 복음서에서 예슈아의 제자들(탈미딤)을 이백 번 넘게 언급하고 있고, 주님이 열한 명의 핵심 제자들에게 맡기신 일이 "가서 모든 민족 가운데 사람들을 탈미딤으로 만들라"(마 28:19, CJB성경)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본문 p67)

 

2. 1세기 랍비는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자신의 해석을 말했다.

 

- 마태는 예슈아의 사역 방식을 다음과 같은 순서로 세 개의 단어로 요약했다 : 가르침, 선포 치유. "예수께서 모든 도시와 마을에 두루 다니시며,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셨다"(마 9:35) (본문 p68)

 

3. 1세기 랍비는 자기 제자들이 경건하고 헌신적인 행위를 하도록 격려했다.

예수님께서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통해 구제와 자비를 베푸는 것을 가르친 것을 예시로 들었다.

 

4. 1세기 랍비는 율법과 관련된 판결을 하거나 분쟁을 해결했다.

복음서에서 많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다양한 질문을 가지고 예수님께 나아오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 대부분은 악한 의도를 가지고 온 것이지만 이 당시 문화로서 다양한 유대인 무리가 랍비에게 율법적 견해를 붇는 일은 흔한 일이었음을 저자는 보여줍니다.

 

이상의 특징들을 충분할 정도로 만족하던 예수님의 모습을 볼 때 예수님께서 랍비셨음에 대해 의심할 부분은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저자는 예수님이 랍비셨지만 분명 그런 동시에 그 이상의 존재이셨음에 대해 이어서 적고 있습니다.

 

1. 랍비 예수는 소외되고 빼앗긴 자들에게 손을 내미셨다.

 

그 분은 많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었다. 삭개오같이 모든 사람에게 멸시받는 이에게 먼저 말을 거셨고 그 집에 가서 '죄인의 손님'이 되셨다. 그리고 삭개오는 가난한 자들에게 자기 소유의 절반을 주고 속여 뺏은 어떤 것도 4배로 갚겠다는 고백을 한다.

 

2. 랍비 예수는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기적을 행하시는 분이었다.

 

그분은 가는 곳곳마다 병자를 낫게하시고 보지 못하는 이들을 보게 하셨고 죽은 자를 살리셨다. 풍랑을 잔잔케 하셨고 물 위를 걸으셨고 심지어는 병든 자들이 예수님의 옷술에라도 손을 대게 간청하였는데, 손을 댄자는 모두 낫게 되었습니다.

 

3. 랍비 예수는 토라에 대한 새롭고 더 나은 접근방법을 가르쳐 주셨다.

 

이 것에 대해 저자가 들었던 예시가 흥미롭습니다.

저자는 3페이지에 걸쳐 당시 안식일을 지키는 것에 대해 당시 탈무드 소논문에 대한 내용 일부를 소개하고 있습니다.(실제 소논문은 그 자체만으로 157쪽이라는군요)

 

그 내용을 일일이 적지는 않겠습니다만, 여러가지 각각의 상황에서 누구에게 안식일 동안 '일'을 한 책임이 있는가에 대한 복잡한 내용입니다. 흥미 있으신 분들은 꼭 읽어봐 주세요.

 

예수님께선 이런 복잡한 내용과 격식에 얽매여 예수님께서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다고 사사껀껀 비판하고 지적을 합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께선 오히려 보란 듯이 안식일에 병든 자를 치유하셨고, 그로 인해 더 많은 논쟁이 일어난 것을 복음서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실제로 저는 이스라엘 회사에 다니고 있어 여러 차례 이스라엘을 방문하였고 그들의 안식일(샤밧)도 바로 근접해서 지켜본 바 있습니다.

 

유대문화에서 그 날의 시작은 저녁입니다. (창세기에서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라 라는 구절에 기인하였지요.) 그래서 샤밧은 금요일 해 질 녘부터 토요일 해 질 녘까지 입니다.

 

그리고 그 샤밧을 길거리에서 보내지 않게 하기 위한 목적으로 대부분의 대중교통은 오후 3시 즈음 다 정지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전기불도 켜거나 끌 수 없고 엘리베이터 버튼도 누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외국인에게 불을 켜달라고 부탁하거나, 샤밧 엘리베이터라 해서 한 개의 엘리베이터는 버튼을 누르지 않아도 자동으로 전층에서 서고 닫고를 반복하는 엘리베이터가 있을 정도입니다.

 

그 종교성이 많이 희석된 현대에도 이 정도일진대, 당시에는 종교의 외형성만큼은 최고였던 시절이었고 그렇기에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그 당시 종교인들에게 있어 최고의 중요성을 가지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하필이면 이런 시절에 예수님께선 왜 안식일을 어기는 것처럼 보이는 행동을 하셨는가? 에 대해 저자는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1)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만들어진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 막 2:27

2)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다 - 막 2:28

3)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은 율법에 맞는 행위다 - 막 3:4

 

수많은 안식일에 대한 규례(할라카)가 난무하고 있었지만 예수님께선 세 개의 단순한 말씀으로 안식일을 재정의 하셨습니다. 

 

그 외에도 산상수훈에 대한 무리의 반응에 대해

 

- "예슈아께서 이 말씀(마 5-7장의 산상수훈)을 마치시자 그 무리가 주께서 가르치시는 방식에 놀랐으니, 이는 주께서 그들의 토라 선생들과 같지 않고 권위 있는 자와 같이 가르치셨기 때문이다."(마 7:28-29, CJB성경) (본문 p87)

 

 

4. 랍비 예수는 선지자였다.

 

이 주제는 앞의 내용과 다음 주제로 이어지게 하는 키워드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일반적인 가르침과 달랐고, 그 말씀의 구분되는 특징은 선지자적인 가르침과 선언이었다는 것입니다.

 

오늘은 여기까지입니다. 평안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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