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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도서 - 하나님을 알자!/신앙도서.. 처음이신가요?

묻다 믿다 하다 / 손성찬 / 죠이북스

by 현명소명아빠 2022. 1. 11.
묻다 믿다 하다 - 흔들리고 의심하며 믿음의 여정을 걷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손성찬 / 죠이북스

http://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aver?bid=13993732

 

묻다 믿다 하다

흔들리고 의심하며 믿음의 여정을 걷는 그리스도인들에게“의미 없는 질문은 없다. 믿음은 하나님을 알고자 하는 욕망으로부터 시작된다!”“저, 목사님 이런 거 질문해도 되나요?” “쓸데없

book.naver.com

2021년이 지나고 2022년이 밝았습니다.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2022년 첫 번째 고른 책은 손성찬 목사님이 쓰신 '묻다 믿다 하다'입니다.


전 책을 선택하기 전 주로 목차와 머리글을 읽어보곤 합니다. 목차를 통해 이 책이 어떤 구성으로 되어 있는지를 알 수 있다면, 머리글은 저자가 어떤 마음과 기획으로 이 책을 썼는지를 유추해 볼 수 있기 때문인데요.

 

이 책의 머리글에서 정말 많이 와닿는 글귀를 발견하고 바로 고르게 되었습니다.

누군가에게 믿어지는 부분이 누군가에게는 그렇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
의심을 의심해 봅니다. 과연 의심이 전제되지 않는 믿음이 존재할까요? 의심한다는 것은 오히려 대상에 대한 최소한의 관심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믿는다는 주장하에 하나님을 알고자 하는 노력을 포기하는 것, 이런 것은 오히려 믿음이 아니라 믿음을 가장한 무관심입니다.  (p13)

기독교인에게 오랫동안 의심과 질문은 교회 내에서 금기시해왔습니다. 마치 그것이 아주 오래전부터 당연시 여겨졌던 것처럼 말이죠.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의 질문에 끊임없이 답해주셨습니다. 심지어 그 의도가 분명히 다른 곳에 있는 이들의 질문에도 말이죠. 

 

교회 안에서 오랜 세월 신앙생활을 해왔던 이들이라 할지라도, 믿음의 여정을 걸어가다 보면, 이해되지 않거나, 쉽게 답변을 받지 못할 질문을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시기가 최소 1번 이상은 찾아옵니다. 그런데 체면 때문에, 혹은 스스로가 믿음 없다고 생각될까 봐, 혹은 그 반대로 자신이 누군가를 그렇게 정죄하고 판단해 왔기 때문에... 이런 많은 이유들로 우리는 의심하거나 질문하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이 머리글에도 잘 드러나듯이 이 책은 가식과 거룩이란 포장지속에 가려진 위선을 벗어던지고, 솔직하게 성도들이 가질 수 있는 질문에 대해 차근차근 그리고 이해하기 쉽게 이야기해주듯 적어나간 책입니다. 글은 솔직하고 쉽게 적고 있지만, 그 주제들은 가볍지 만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의심과 질문으로 인해 답답함과 힘든 시간을 보냈던 이들이 정말로 많았을 그런 주제들을 골라 답변해 주고 있는 책입니다.

 

그리고 성경을 읽으며, 이 구절의 의미가 무엇인지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들 혹은 교회 내에서 전통적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론 잘못된 의미로 해석되고 이해되는 구절들에 대한 올바른 안내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현대에 점점 그 의미가 쇠퇴해 가는 교회 공동체에 대한 의미와, 찬반 논쟁이 분분한 십일조에 대한 당시의 시대상을 고려하여 고찰한 부분 또한 많이 와닿았습니다.

 

 

그래서 이 책은 이제 막 신앙생활을 시작한 이들에게 특히 권합니다. 교회 특유의 문화와 언어들이 아직 낯설고, 의문점도 많고 궁금한 것도 많지만, 괜히 물어보면 믿음 없는 사람 취급받을까 물어보지도 못하는 분들께 많은 도움과 위로가 되리라 믿습니다.

이 책을 읽는 모든 독자와, 자신도 모르게 의심을 숨기고 있는 100만 의심인 여러분, 의심하되 끝까지 의심하십시오. 중간에 그만두지 마십시오. 성실함이 결여된 의심은 결국 자기 지성의 기만을 불러오고 목적 없는 회의주의자로 남게 합니다.
"의심하는 자여, 복이 있으리라!" (p15)

"죄는 미워하되 죄인은 미워하지 말라." 기독교인들이 흔히 쓰는 표현입니다. 이 얼마나 멋있는 표현인지요. 그런데 사실 개 호랑말코 같은 이야기입니다. 타인을 바라보는 시각을 감정과 분리하는 것은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그렇게 무 자르듯 분리되는 것이 아닙니다.
...
우리는 이 말을 자신의 종교적, 도덕적 우월성을 한껏 높이는 정신 승리의 언어로 쉽게 사용합니다. 참으로 답도 없는 병자들입니다. 그런데 이 병자들이 판사복을 입고 병원 입구에 서서 골든타임의 병자들을 돌려보내곤 하니 더 미칠 노릇입니다. (p24, 25)


(하겠다고 하고 순종하지 않은 첫째와 하지 않겠다고 했다가 순종한 둘째 이야기를 통해) 결국 말씀대로 가서 '했다'는 행동의 결과보다 아버지와의 관계에 주목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아버지를 무조건 추종하는 관계, "YES"만 대답해야 하는 비인격적인 관계가 아니라, "NO"라고도 말할 수 있는 인격적 관계에 대해 강조하시려던 것이 아닐까요?  
...
결과에서도 차이를 드러냅니다. 무조건 "YES"를 날렸던 첫째 아들, 그런 유형은 아마 자기 유익에 따라 가능한 상황에서만 아버지의 말을 따랐을 것입니다. 하지만 둘째 아들은 자기 유익에 반하는 상황에서도 주체적으로 순종할 인간입니다. 그래서 담대히 말하고 싶습니다. 때론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는 신앙이 건강한 신앙입니다.                                                                                                                                          (p31)


물론 믿음의 크기는 평가할 수 있습니다. 다만, 우리는 그것을 평가할 수 없습니다. 우리 중에 남의 믿음을 정확하게 통찰하여 그 수치를 볼 수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 정도를 매기는 것은 하나님이 아닌 자기 기준에 의한 것입니다. 오직 주님만이 하실 수 있는 영역인데 말이죠. 
그래서 '믿음의 크고 작음'이 인간의 교묘한 주둥이를 통해 터져 나오는 순간, 그것은 이미 하나님의 자리를 빼앗아 버린 오만한 말이자 회색 지대를 지향하는 자기만족 욕구가 짙게 깔린 비신앙적 표현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더는 '믿음이 부족해서...'라는 말 디에 숨지 맙시다. (p39)


(천국은 어린아이의 것이라는 구절에 대해) 그런데 '어린아이'를 표현함에 있어 조금 결이 다른 예수님의 가르침이 있습니다.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여기서 '어린아이'의 의미 역시 '약함'이라는 뜻의 연장선상에서 바라볼 수 있으나, 의미가 더 한정됩니다. '지혜롭고 슬기 잇는 자들'과 반대되는 속성의 인물을 상징하는 것이지요. '어리석음'이랄까요? 소위 '멍충이'지요.
...
상황 및 관계에 대한 의식 혹은 자기 유익을 위한 노림수를 완전히 배제하고 멍청할 정도로 한 길만 선택하는 것, 바로 이것이 하나님 나라에서는 지혜입니다. (p56)


인생은 결코 계획대로 되지 않습니다. 대부분 우리 인생의 불만은 여기서 시작됩니다. 괜찮습니다. 충분히 표출하십시오. 맘껏 두려워하십시오. 하지만 누가 봐도 불쌍한 상황이 아니라면, 그리고 믿는다고 고백한 지 쪼매 되었다면, 이제는 인생의 주체를 명확히 합시다. 
내 인생을 내가 통제할 수 있다는 객기에서 비롯된 염려보다는 하나님의 인격과 그분의 열심을 신뢰합시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이것은 하나님 외에는 나의 주권자가 없다는 고백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견지할 수 있는 유일한 삶의 자세는 '감사'가 아닐까요? (p68)


저도 상황마다 하나님이 구구절절 설명 좀 해주시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믿으렵니다. 늘 이유에 대한 설명과 정답을 요구하는 인간의 본성과, 이를 조장하는 세상의 흐름 가운데 정답 그 자체이신 하나님께 의존하는 생각의 전환이 필요합니다. (p95)


그래서 사랑으로 넘쳐나는 공동체의 존재가 필요합니다. 가면을 벗어던지고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하며 서로를 위해 진심으로 기도하고 하나 되어 영적인 교제를 하는 것은 진정한 기적입니다. (p115)


신앙은 늘 '공동체적'으로 존재합니다. 만약 누군가가 실족한 다면, 하나님은 당사자에게 책임을 묻기보다 그 옆에 패키지로 묶어 주신 인생들에게 책임을 물으실 것입니다. 신앙이 성숙하다면 내 짐만 무겁게 느끼는 게 아니라, 남의 짐도 무겁게 느끼는 게 당연지사지요. (p137-138)


말라기 말씀의 맥락을 이해해야 합니다. 당시 십일조는 단순한 헌금이 아니라 신정일치제 사회를 사회를 지탱하는 선순환의 재정 운용 시스템이었습니다. 그러니 응당 내야 하고 낼 수 있는 이들이 그것을 이행하지 않으면 문제가 발생합니다. 십일조로 운영되어야 하는 두 가지 주요 포인트, 즉 먼저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인 성전 운영이 되지 않습니다. 성전도 돈이 있어야 운영됩니다. 하나님이 다 하신다는 순진한 생각은 내려놓으십시오. 반대로 돈 이야기하면 세속적이라고 보는 신 바리새인주의 시각도 내려놓으십시오. 그리고 십일조의 또 다른 목적인 이웃을 사랑하는 일, 즉 가난하고 약한 이들을 구제해야 하는 일 역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
그릇에 담지 않으면 결국 내용물이 사라지지요. 그래서 본질을 담는 형식, 즉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라는 신앙고백을 담을 그릇이 필요합니다. 최초의 그릇이 하나님께서 제시한 십일조입니다. (p155-156)


마지막 즈음 챕터 제목이 인상 깊어 한번 따로 적어봅니다.

 

'하나님은 네가 뭘 선택하든 별로 관심 없으시다.'

 

우리는 무언가를 새로 시작하거나, 무슨 일을 새로 시작하거나, 무슨 관계를 새로 시작할 때 하나님의 뜻을 흔히 묻곤 하고, 그 묻는 것에 많은 노력과 시간을 사용합니다. 그리고 그렇지 못할 때에 우리는 괜한 죄책감과 왠지 모를 찜찜함을 가지곤 합니다.

 

이 마지막 챕터의 의미는 하나님은 우리가 뭘 하던 무관심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바로, 하나님의 최종 관심은 내가 무엇을 하느냐에 있지 않고 바로 '나' 자체에 있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이유 없는 사랑을 하지 못하지만, 하나님께선 우리 존재 자체를 이유 없이 사랑해 주십니다. 그래서 인간의 입장에선 이 사실을 받아들이기 쉽지 않고,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지 않으신다고 낙담하기도 하지요.

 

하나님께선 우리의 존재 자체를 사랑하시고, 우리에게 놀라운 계획과 관심, 그리고 사랑을 품고 계시다는 사실을 굳게 믿는다면... 세상 속에서 더 당당한 주의 백성으로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요?

 

이 책에서 제가 가장 감명 깊게 읽은 부분이어서 맨 마지막에 따로 적어 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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