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집사는 얼마 전에 성경 1독을 마치고, 가뿐하게 창세기를 다시 시작하고 있습니다. 많이 반복해서 읽었던 내용이라 그리 특별할 건 없었는데, 그중 에서가 아버지에게 울며 자신에게 축복을 해 달라고 애원하는 창세기 27장 34절 구절이 와 닿았습니다.
저렇게 안타깝고 억울한 일이었을까? 정작 본인은 비록 이 시점보다 더 어릴 때지만 팥죽 한 그릇에 장자의 명분을 쉽게 팔아넘겼으면서?
그런 의문이 들던 김집사는 조금 더 생각해 보았습니다. 당시 유대 아니 중동 문화는 장자의 권위는 대단했다고 알고 있습니다. 지금처럼 형제들끼리 어느 정도 공평하게 유산을 분배받는 것이 아닌, 장자가 모든 것을 가져간다고 봐도 무방한 그런 때였으니까요. (그런 의미에서 막내에서 왕까지 오른 다윗은 정말 인생 역전이란 생각이 문득 김집사의 뇌리를 스쳤습니다.)
실제로 창세기 25장 5절에 보면 아브라함이 자신의 약속된 장자인 이삭에게 자기의 모든 소유를 주었고, 후처에게서 본 서자들은 따로 재산을 얼마큼 주어 이삭을 떠나 살게 만들었다는 구절을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장자의 권리의 정점인 아버지의 축복은 그 가치가 저렇게 억울해할 만큼 크다 할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알고 보면 이 일은 이미 에서와 야곱이 어머니 리브가의 뱃속에 있을 무렵 이미 예견된 일이었지요. 창세기 25장 22 - 23절에 보면 아이들이 뱃속에서 서로 싸우서 이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물으니 두 민족이 뱃속에 있는데,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긴다고 말씀해 주셨지요.
이삭은 분명히 하나님께 물었고 그 답을 들었지만, 이삭은 남자다운 에서를 더 좋아했습니다. 하나님의 응답보다 자신의 선호도가 더 앞섰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아마 그 어머니 리브가는 기억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죽기 전 에서에게 축복하려는 이삭의 축복을 야곱에게 돌리고자 술수를 쓰게 되지요.
그 이후 얘기는 많은 분들께 익숙합니다. 아내 둘과 자신의 몫의 소유를 얻기 위해 20년을 고생하여 간신히 거부가 된 야곱이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오고, 극적으로 에서와 화해를 하게 되는 이야기지요.
그런데 김집사는 조금 의아한 구절을 보게 되었습니다. 바로 창세기 36장인데요. 여기서는 에서 즉 에돔 족속의 족보에 대해 죽 나열을 하고 있는데요. 6 - 7절을 보니, 에서가 자기 가족과 소유를 데리고 가나안 땅에서 다른 곳으로 가는데 그 이유가 두 사람의 소유가 풍부하여 같이 거주할 수 없는 상태였다고 그 이유를 설명합니다.
여기서 가 중요한데요.
야곱은 20년간 타지에서 뼈 빠지게 고생해서 부자가 됩니다. 외삼촌의 갈취와 부당한 대우를 받으면서 말이죠. 에서는 어떤가요? 자세히 나오지 않았지만, 아버지 소유를 그대로 이어받은 듯해 보입니다. 그리고 과정과 상관없이 두 사람 모두 부자가 되었지요.
정말 에서가 축복을 빼앗긴 걸까요?
여기서 김집사는 멈추지 않고 바로 그 '축복'의 내용을 다시 돌아가 살펴보았습니다.
창세기 27장 27 - 29절까지에서 그 축복의 내용이 나오는데요. 물질적 풍요에 대한 축복에 이어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만민이 너를 섬기고 열굴이 네게 굴복하리니 네가 형제들의 주가 되고 네 어머니의 아들들이 네게 굴복하며 너를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고 너를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기를 원하노라'
사실 야곱에게 이 구절이 직접적으로 적용된 적은 없어 보입니다. 그래서 더 이상했습니다. 표면적으로는 야곱이 더 고생을 많이 했고, 그렇게 아버지를 속이며 받은 저 축복의 내용은 적용되지 않은 것처럼 보입니다.
그때 김집사의 뇌리를 스친 것은 이 축복이 야곱이 아닌 야곱의 후손인 메시아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구나 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죽기까지 낮아지셨으나 하나님께서 그를 다시 살리셨고, 만왕의 왕으로 삼으셨으니까요.
야곱이 정작 받은 축복은 자신만이 잘 먹고 잘 사는 축복이 아니라, 자신이 구원의 여정의 뿌리가 되는 것이었다는 것을 김집사는 그제야 깨달았습니다. 온 인류를 살리는 그 위대한 구원의 여정의 시작점 중 하나가 되어, 훗날 하나님께서 자신을 지칭하실 때 많이 쓰셨던 표현인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이란 그 호칭의 대상이 된 것이었죠.
그는 정작 말년에 많은 풍파를 겪고 바로 앞에서 자신이 험악한 세월을 살았다 할 만큼, 인간적으로 축복받은 삶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의 인생을 통해 그리고 그의 후손을 통해 온 인류를 살릴 메시아의 구원 사역이 나타난 그 과정이 되는 것이 그에게 주어진 가장 큰 축복임을 김집사는 깨달았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에서는 축복을 빼앗긴 것이 맞습니다.
그리고 우리 또한 참된 축복의 의미를 오해한다면.. 에서와 다를 바 없을지도 모릅니다.
'김집사 어디가~ 시즌2'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시즌2 #30] 당신에게 천국은 왜 좋은 곳인가요? (부제 : 사춘기 딸네미와의 대화 #2) (0) | 2020.09.23 |
---|---|
[시즌2 #29] 당신은 죄의 결과에 대한 두려움이 있습니까? (부제 : 사춘기 딸네미와의 대화 #1) (0) | 2020.09.15 |
[시즌2 #27] 김집사야.. 딸네미한테 사과하지 않을래? (0) | 2020.08.13 |
[시즌2 #26] 같은 18개월, 그러나 절대 같지 않은 무게 (feat. 무너진 공의에 분노하시는 하나님) (0) | 2020.07.10 |
[시즌2 #25] 열므나의 비유를 아시나요? #2 (0) | 2020.07.05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