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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도서 - 하나님을 알자!/믿고 보는 저자 - 신앙편

인생 질문 / 팀 켈러 / 두란노 #1

by 현명소명아빠 2019. 12. 1.

Main category: 신앙도서 - 하나님을 알자!

  • Subcategory: 믿고 보는 저자 - 신앙 편
  • 추천 대상:
    • 복음 중심의 내용을 쉽게 와 닿게 설명하는 "팀 켈러"를 만나보고 싶으신 분
    • 신앙생활 중에서 내 안에 저절로 생겨나는 질문에 대한 명쾌한 답변을 얻고 싶으신 분

팀 켈러 목사님은 뉴욕 맨해튼의 리디머 교회를 설립한 설립 목사님이자 아무도 가능하리라 여기지 않았던 도시의 다양한 인종, 사상을 가진 이들에 대한 '도시 선교'를 추진한 분입니다.

 

예전 저를 청년부 시절 지도해 주셨던 목사님의 두 분의 추천 저자 중 한 분이신 팀 켈러 목사님은 탁월한 저자이기도 하십니다. 탁월하다고 지칭하는 이유는 단순히 유명한 분이어서가 아니라 복음주의적 주제에 대해 쉽고 명쾌하게 그 주제를 이해시키는 작가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분의 책을 도서관에서 처음 접하고 그 내용을 조금 더 깊이 다시 읽어보고 싶은 마음이 커서 도서 구입까지 다시 하게 된 저자 중 한 분 이 시기도 합니다.

 

아직도 제 인생 책 중 하나로 꼽히는 "팀 켈러, 하나님을 말하다"와 "거짓 신들의 세상"은 아직도 한 번씩 펼쳐서 그 내용을 다시 탐독하는 책이기도 합니다.

 

이 책은 Part1과 Part2로 나뉘는데요.

Part1은 복음서에서 나타나는 예수님을 만난 인물들을 살펴보면서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그리고 신앙생활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품게 되는 의문에 대해 해답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Part2는 우리가 간과하거나 정확히 알지 못하는 부분에 대해 짚어주면서 그리스도인이 가져야 할 바른 신앙 지식을 갖게 합니다.

 

"Part1 예수와의 조우, 인생의 답을 얻다"부터 같이 보도록 할까요?

 

먼저 질문 리스트와 그에 상응하는 인물들을 살펴보겠습니다.

 

1. 회의론자 : 나다나엘

=> "기독교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는가"

 

2. 인사이더와 아웃사이더 : 니고데모와 사마리아 여인

=> "기득층과 소외층이 있는 현 세상, 뭔가 잘못된 거 아닌가"

 

3. 슬퍼하는 자매들 : 마르다와 마리아

=> "신이신 예수가 인간의 슬픔을 알겠는가"

 

4. 혼인잔치 : 예수의 어머니

=> 답을 주러 온 것이 아니라 예수가 진짜 답인가"

 

5. 최초의 그리스도인 : 막달라 마리아

"정말 부활이 가능한가"

 

 

하나하나의 주제가 모두 너무 와 닿아서 빼는 것 없이 다 다루려 하는데요. 꽤 길어질 수도 있음을 미리 말씀드립니다.

 

일단 나다니엘부터 만나보도록 하겠습니다.

 

나다니엘에 대해 책에서는 똑똑한 척하고, 조금 편협하고 출신지를 기준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인물로 그려집니다. 실제로 그의 친구 빌립이 그에게 와서 예수님을 소개할 때 나사렛 출신으로 이야기했는데 그것에 대해 비웃는 장면을 보게 됩니다. 

 

그 자신도 예루살렘 출신이 아닌 갈릴리 출신임에도 자신보다 더 시골 출신에 대해 편견을 갖는 모습을 보게 되니, 편협하다 평가받아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저자는 이 시선을 현대의 기독교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과 비교하여 적고 있습니다.

당신이나 당신의 지인이 기독교에 대해 '나사렛'과 같이 본다고 해도 놀랄 일이 아니다. 오늘날 기독교를 나다나엘이 나사렛을 보듯 하는 사람이 많다. 기독교는 사람들에게 '나사렛'에 부로가 하다. 사람들은 자신이 생각하는 기독교를 조롱하기 좋아한다.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며 자기들을 위해 어떤 일을 하셨고 또 하실 수 있는지에 대한 기독교의 주장에도 마찬가지의 태도를 취한다. 기독교에 대해 좀 안다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기독교라면 나도 다 알아. 그 속에서 자랐어. 나한테는 맞지 않음을 진즉 깨달았지. 내 마음은 이미 정해졌어"라고 말한다.

이렇듯 과거에도, 현재에도 예수님은 여전히 나사렛 출신에 불과하다. (본문 32-33)

 

이런 회의론적 태도에 대해 저자는 2가지를 권하고 있는데요. 첫째는 그런 관계를 깨는 '멸시'는 모두에게 해롭다는 것과 기독교를 멸시함으로써 차별에 대한 부분과 사랑과 같은 본질적 가치에 대해서도 무시해 버리게 된다는 위험성이 그 내용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핵심은 그런 '교만'과 '멸시'의 문제를 가진 나다나엘의 내면 깊은 곳에는 '영적 욕구'가 있었다는 점인데요. 여기서 많은 현대인들 특히나 종교에 대해서 회의적인 태도로 일관하고 있는 이들의 내면에서도 또한 이런 영적 탐색과 영적 욕구가 있다는 점을 저자는 짚고 있습니다.

공공연히 요란하게 내세우던 회의론 이면에는 많은 영적 탐색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 야심차고 똑똑한 모든 젊은이는 겉으로는 근본 문제의 답에 별로 관심이 없거나 각자 열심히 추구하던 분야에서 이미 답을 찾은 척했다. 그러나 속에는 우리와 똑같이 아무도 피할 수 없는 욕구가 숨어 있었다. 그들은 답을 찾아야 했고 그중 다수가 기독교에서 답을 얻었다. (본문 p40)

 

현대인들은 기독교의 무용론을 쉽게 말합니다. 사회는 혼란하고 여러 갈등과 분쟁은 끊임없이 발생하는데 기독교는 그런 모든 것들에 대해 무능하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말씀대로 살지 못하는데 따른 모습이 그런 주장을 더 부추긴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옳고 그름 소용이 있고 없고를 말하는 기준을 세우려면 먼저 "목적"을 알아야 한다는 것을 저자는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시계의 비유를 들어 자신의 주장에 대해 뒷받침하고 있는데요. 

 

이 시계가 좋은 시계인지 나쁜 시계인지 판단하려면 시계가 만들어진 '목적'을 알아야 합니다. 만약 시계를 가지고 못을 박는데 쓰다가 깨진다고 해서 그 시계를 나쁜 시계로 말할 순 없다는 뜻입니다. 시계의 목적은 시간을 알리는 것이고, 그 목적에 부합하여 시간을 정확히 알려주는 시계라면 그 시계는 좋은 시계라고 판단해도 좋을 것입니다.

 

인간의 사회에서도 자연에서 흔히 발견되는 "약육강식"이 순리라고 믿는다면, 우리는 강대국이 약소국을 침탈하고, 힘 있는 사람이 힘없는 사람의 것을 강탈하는 것에 대해 비판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없는 한 오든은 내 감정이나 생각이 다른 사람의 감정이나 생각보다 정당하다고 말할 권리가 없음을 깨달았다. 하나님이 없다면 우리가 소중히 여기는 모든 가치는 가공의 산물임을 깨달은 것이다. 그런데 그게 가공의 산물이 아니라고 - 인종 학살이 정말 절대 악이라고 - 확신했기에 그는 하나님이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다 달았다.
..(중략)..

그런데 당신이 이렇게 말한다면 어떻게 될까? "나는 하나님이 있는지 없는지 모른다. 인간이 지어진 목적도 없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믿는다면 당신은 다시는 인간의 선악에 대해 말해서는 안 된다. 인간이 지어진 목적이 없다고 믿으면서 당신이 특정인에 대해 "저 사람은 바르게 살지 않는다. 행실이 틀렸다"라고 말한다면 이는 자가당착이나 표리부동이다. (본문 p43-44)

 

저자의 시선은 다시 나다나엘로 향합니다. 바로 그렇게 회의적이고 못 미더운 눈을 하던 나다나엘이 한순간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자, 이스라엘의 임금으로 고백하는 바로 그 장면 말이죠.

 

예수님께선 아마도 나다나엘의 외면적 모습 너머 깊숙한 곳의 영적 욕구를 보셨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2가지 처방을 내리시는데요. 그 첫째가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는" 이스라엘 사람이라 칭하시는 장면입니다. 솔직하고 직설적인 나다나엘.. 아마도 그 성격 탓에 주변 사람들에게 맘에 없는 소리는 못했을 것이고, 적잖이 눈총도 받아왔을 나다나엘의 그 본질을 온유함으로 한 번 짚으십니다. 

 

이에 나다나엘이 놀라 어떻게 자신을 이렇게 잘 아시는지를 반문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두 번째 처방을 내리십니다. 바로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노라"라고 말씀하시죠. 

 

그리고 예수님께 고백을 드리는 나다나엘에 대해 예수님은 다소 의외의 부드러운 책망을 하십니다. 바로 초자연적인 기적을 보고서 덥석 태도를 바꾸는 그에게 "아직 아니다!"라고 말씀하시는 부분이죠.

 

한결같이 회의론만을 주장한다면 그는 영원히 진리를 알지 못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렇다고 본질과 진리에 대한 확신 없이 쉽게 태도를 바꾸는 것 또한 좋지 않습니다.

 

복음은 진리입니다.

그 진리의 복음에 대해, 우리가 메시아로, 우리를 죄에서 대속하신 구세주로 믿는 예수님에 대해 바로 알지 못하고 복음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지 않고 믿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많은 이들이 처음부터 진리와 복음에 대해 알고자 하는 열망으로 신앙생활을 시작하지는 않습니다. 그 반대가 보편적이지요. 몸이 낫기 위해, 외로움을 위로받기 위해, 단순한 친분으로.. 그러나 그 내면에서는 반쯤은 의심과 반쯤의 기대로 나아갈 것입니다.

 

그런 태도와 상관없이 성령님은 우리에게 더 크고 위대한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찾는 것보다 늘 무한히 크시며 놀라우신 그분을 말이죠.

 

쉽게 단념하지도 마시고, 분명한 복음에 대해 알기 전에 믿는다고 스스로 착각하지도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2에서는 공통점이라고는 1도 찾아보기 어려운 두 사람을 통해 전하는 메시지를 만나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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