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in category: 신앙도서 - 하나님을 알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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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복음 중심의 내용을 쉽게 와 닿게 설명하는 "팀 켈러"를 만나보고 싶으신 분
- 신앙생활 중에서 내 안에 저절로 생겨나는 질문에 대한 명쾌한 답변을 얻고 싶으신 분
#4는 Part2 8번 "순종하시는 주님"과 "아버지의 오른편" 두 부분을 다루고 10번째 "마리아의 용기"편은 생략하면서 마무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사실 "순종하시는 주님 : 십자가에서 죽으심"은 우리에게 너무 친숙한 주제이고 더이상 이 부분에서 새롭게 알게 되거나 새롭게 더 받을 은혜가 있을까 하는 성급한 생각이 앞서지 않는가요?
그런 저의 마음을 알기라도 하듯, 저자는 빌라도 법정이 아닌 잡히시던 밤 겟세마네에서 기도하는 예수님의 모습을 적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26장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겟네마네라 하는 곳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저기 가서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 하시고 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을 데리고 가실새 고민하고 슬퍼하사 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시고
좀 의아하지 않은가? 순교를 앞둔 많은 신앙의 선배들 예를들어 스데반 집사와 같은 이들이 얼마나 평온하게 죽음을 맞이했는지를 아는 우리로서는 십자가의 죽음을 앞두고 계시다고는 하지만, 이런 예수님의 모습은 좀 낯설지 않은가?
앞서 살펴보았지만, 예수님은 자신이 어떤 죽음을 당하실지, 그로 인해 어떤 목적을 이루실지를 공생에 초기부터 이미 잘 알고 계셨습니다. (인생 질문 #2 혼인잔치 편을 참조해 주세요) 그런데 갑자기 이런 반응을 보이시다니요? 이 장면을 이렇게 자세히 그리고 찬찬히 들여다보니 충분히 낯선 예수님의 모습이 그제야 보이는 것 같습니다.
이것에 대해 저자는 주석가들의 설명을 통해 이것을 설명합니다.
예수께서 친히 이 잔을 언급하신 것으로 보아 그분은 자신이 육체적 고문과 죽음뿐만 아니라 온인류의 악과 죄에 대한 하나님의 충천한 진노를 받게 되심을 아셨다. 우리가 당해야 할 하나님의 사법적 진노가 예수님께 임한 것이다.
이 진노가 남김없이 다 부어진 것은 이튿날 십자가에서였지만 - 그때 그분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부르짖으셨다 -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부터 그 진노를 맛보기 시작했다는 주석가들의 생각에 나 역시 동의한다. 이 사법적 진노는 과연 어떤 느낌이었을까? 바로 하나님의 부재라는 고문이었다. (본문 p202-203)
왜 진노를 맛보셨어야 했을까? 아니 좀 더 정확하게는 왜 성부 하나님께서는 성자 예수님에게 '이 때'부터 고난을 시작하게 하셨을까?
이 땅에서 인간의 모습으로 사셨던 주님은 우리와 같이 하나님 아버지와의 교제와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기쁨을 누리셨다. 그러나 다른 어떤 인간과도 달리 강렬한 하나님의 사랑과 임재를 나누셨을 것이다. 또 아버지와 충만하게 교제하는 무한한 복을 온전히 아셨을 것이다.
그런데 그 동산으로 걸어가며 기도를 시작하실 때는 갑자기 - 영원이라는 시간 동안 처음으로 - 하나님과의 모든 통신이 끊겼다.
마가복음 주석을 쓴 빌 레인은 겟세마네 동산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잔을 거두어 달라고 기도하실 수밖에 없었던 그 처절한 슬픔과 불안은 그분이 만나게 될 암담한 운명이 두려워서가 아니었고 임박한 육체적 고난과 죽음에 위축되어서도 아니었다. 그보다는 온전히 아버지만을 위해 사시던 자신이 곧 하나님으로부터 단절될 것에 대한 공포였다. 예수께서 짊어지신 죄의 심판에 그런 단절이 내포되어 있다. 예수님은 배반당하시기 전에 아버지와 함께 있으려고 그곳에 갔는데, 천국 대신 지옥이 앞에 열린 탓에 비틀거리셨다" (본문 p204-205)
이 순간의 장면이 제 가슴을 먹먹하게 합니다. 태초부터 이어지던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가 단절되어 버리신 그 순간이 하필 가장 가슴이 무너지고 힘든 그때였다니요. 이것을 알고 난 이후에야 왜 예수님이 그렇게 힘들어하셨는지.. 왜 예수님이 땀을 피같이 흘리시며 기도하실 수밖에 없으셨는지를 이해하게 됩니다.
그리고 여기서 예수님의 '수동적 순종'과 '능동적 순종'의 개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저자의 글을 그대로 인용하기엔 다소 길어서 나름 요약해 보고자 합니다.
- 수동적 순종
- 예수님께서 수동적 순종을 통해 우리 몫의 형벌을 당하시고 우리를 대신해 죽으셨다.
- 이로 인해 우리는 정죄로부터 완전히 해방되었다.
- 수동적 순종만 믿는다면 우리는 우리의 실수로 인해 그분의 은총을 잃을 수 있는 엄청난 압박감과 두려움을 안고 살 수 밖에 없다. 또한 용서는 받았지만 하나님께 사랑받는다는 확신을 가질 수 없다.
- 능동적 순종
- 예수님께서 능동적 순종을 통해 생애 전체, 특히 죽음을 통해 하나님의 율법의 적극적 요구를 충족시키셨다.
- 우리가 살아야 했을 사랑과 충절의 위대한 삶을 사셔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복을 받아 누리게 하신다.
- 그분은 공생에 내내 이 단절에 대해 아셨고, 특히 하나님과의 단절이 어떤 것인지를 너무나도 확연히 체험적으로 아신 바로 그때에조차 능동적으로 순종하셨다.
저자가 적고 있는 하나님의 숨겨진 메세지는 아래와 같다.
"여기 네가 마실 잔과 네가 던져질 풀무가 있느니라. 저기 잠들어 있는 네 친구들이 보이느냐. 그들이 구원받으려면 다른 길은 없나니 곧 네가 죽지 않으면 그들이 망하리라. 열기가 얼마나 맹렬한지 보라. 네가 당해야 할 고통과 고뇌를 보라. 그런데도 너는 그들과 나를 한없이 사랑하여 기꺼이 이 잔을 마시겠느냐."
(본문 p211-212)
어쩌면 이제까지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한 사랑을 반쪽만 알고 반쪽만 이해해온 것은 아닐까 생각이 듭니다.우리 죄를 사하여 주신 그 사랑, 그리고 이미 당신의 의로 우리를 덧입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게 하시는 그 사랑을 모두를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이어서 Part2 9번째 "아버지의 오른편 : 승천의 의미"를 살펴보겠습니다.
사실 십자가의 죽음, 부활, 승천, 재림은 중요한 복음의 메세지 주제들이지만, 그중 유독 승천에 대해서는 그 의미를 깊게 생각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일단 예수님의 승천을 목격한 제자들의 당황한 모습속에서 그들에게도 예수님의 승천은 당혹스러운 일이었던 듯합니다. 오셨으니 다시 돌아가시는 것은 얼핏 당연해 보이지만, 굳이? 왜?라는 질문은 여전히 남는 것 같습니다. 물론 이 챕터를 읽기 전에는 그런 질문조차 안 들었지만 말이죠.
승천에 대한 의미를 생각해 보자면
1. 예수님의 승천은 지상을 떠나신 것만이 아닌 아버지 하나님이 계신 천국으로 가신것이다.
2. 승천 전의 예수님은 시공간 안에서 존재하셨지만, 승천하심으로 시공간의 제약을 벗어나 아버지의 임재 속에 들어가셨다.
이것에 대해 저자의 설명을 읽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신학적으로 말하자면 지금 예수님은 전 세계를 상대로 (천국에서) "자신의 중보 사역을 적극 지속하신다." 그분은 여전히 선지자로서 말씀으로 우리를 가르치고 교훈하시되 이제 성령을 통해 어디서나 하신다. 그분은 여전히 왕이시되 이제 자기 백성에게 주신 은사를 통해 교회 전체를 인도하고 지도하신다. 그분은 여전히 제사장으로서 우리를 상담하고 지원하시되 이제 아버지의 면전에서 우리를 대변하신다. (본문 p229)
이 마지막 2개의 장면을 통해 우리는 겟세마네에서 예수님의 고난의 시작과 그분의 능동적 순종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고, 승천의 의미를 통해 지금도 초월적으로 우리를 중보 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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