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in category: 신앙도서 - 하나님을 알자!
- Subcategory: 믿고 보는 저자 - 신앙 편
- 추천 대상:
- 복음 중심의 내용을 쉽게 와 닿게 설명하는 "팀 켈러"를 만나보고 싶으신 분
- 신앙생활 중에서 내 안에 저절로 생겨나는 질문에 대한 명쾌한 답변을 얻고 싶으신 분
#2를 시작하기 앞서, Part1 2번째 글인 "인사이더와 아웃사이더"는 유대사회 기준 여성으로서 그리고 사마리아인이라는 정체성으로 인해 그리고 인생의 구원을 남편에게 걸었던 한 여성과, 그와 정반대로 남성이자 유대교 중심에 있는 그러나 그 역시도 구원이 필요했음을 예수님을 통해 알게 된 니고데모를 연결해서 구원의 필요는 그 어떤 사회적 조건과 무관하게 우리에게 필요한 것임을 적고 있습니다.
Part1 3번째 글인 "슬퍼하는 두자매"에서는 예수님께 같은 질문을 던지지만, 마르다에게는 '진리의 사역'을, 그리고 마리아에게는 '눈물의 사역'을 각각 베푸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통해 인간의 몸이셨기에 우리의 마음과 어려움을 너무 잘 아시는 예수님께서는 각각 정말 필요한 부분을 채우시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아울러 예수님의 눈물은 그분 또한 우리를 죽음에서 구원하기 위해 자신이 치러야 할 대가를 아시고 흘리신 눈물이셨다는 것을,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고 계셨는지를 그 장면을 통해 보여줍니다.
#2는 Part1 4번째 글인 "혼인 잔치"부터 보고자 합니다.
이 장면에서 마냥 말 잘 듣는 아들이었을 것 같은 예수님과 어머니 마리아와의 갈등의 장면이 그려집니다. 그리고 이 장면은 예수님의 많은 기적 중 하나로 여겨지기 보단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보여주는 '표적'의 장면으로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한복음 2장
예수의 어머니가 예수에게 이르되 저들에게 포도주가 없다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
..(중략)..
예수께서 이 첫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의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
저자는 이 '표적'이라는 키워드를 기반으로 왜 예수님의 정체성을 드러내시는 첫 표적의 기사를 이 혼인잔치로 기술하였는지 그 저자의 의도를 적습니다.
예수께서 이 상황에(그리고 우리에게) 무엇을 가져다주는지부터 보자. 9절에서는 '연회장'이 소개된다. 그는 행사 진행을 맡은 사회자였다. 하객들을 불러 축하하게 하고 그 축하의 조건을 두루 완비하는 게 그의 직무였다. 한마디로 그에게는 파티의 흥을 돋울 책임이 있었다. 그런데 예수께서 물로 포도주를 만들어 난국을 수습하셨다. 그리고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내가 참 연회장이니 나는 잔치의 주인이니라"
어떤 사람은 말할 것이다. "잠깐만 나는 그분이 자신을 낮추고 영광을 버리고 거부당하여 십자가를 지기 위해 오신 줄로 알았다. 물론 맞다. 그러나 어떤 면에서 예수님은 그 처참한 상실과 고통조차도 전체 맥락 안에 두신다.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맞아, 나는 자기를 부인하고 고난당할거야. 옳다. 나로부터 시작하여 나를 따르는 이들도 장차 희생을 겪을 것이야. 그러나 이 모두는 수단이며, 목적은 축제의 기쁨이라! 이것은 다 부활과 새 하늘과 새 땅을 이루어 모든 악과 사망과 눈물을 그치게 하기 위함이라. (본문 p97-98)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우리 죄를 사하시기 위한 고난과 죽임 당하심을 위해서이지만, 그것은 과정일 뿐, 그 과정을 통해 우리는 다시 하나님의 잔치에 참여하는 기쁨을 누릴 수 있음을 예수님께선 상징적으로 보여주셨고, 그것을 요한복음의 저자 또한 보여 주고 싶었다는 것이 저자의 의도로 보입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예수님께서 어머니께 냉정하게 말을 한 이유에 대해서 더 짚고 있습니다.
바로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란 구절을 통해서 말이죠.
수수께끼 같은 말씀을 하시는 순간의 예수님은 마치 어머니와 신랑 신부와 전체 피로연장 어머로 저 멀리까지 내다보신 듯하다. 다른 무엇을 보신 것이다. 그분의 생각은 이렇다. '옳소이다. 나는 이 세상에 축제의 기쁨을 가져올 수 있고 죄책과 수치로부터 인류를 깨끗하게 할 수 있나이다. 기쁨을 주러 내가 세상에 왔나이다. 그러나 어머니여, 그러려면 내가 죽어야 하나이다.
..(중략)..
여기 결정적 질문의 답이 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기쁨을 가져다주시기 위해 어떻게 하시는가? 자신의 기쁨을 모두 잃으신다. 아버지와 함께 사시던 하늘을 떠나신다. 일생을 오해받으며 외롭게 사신다. 십자가에서 우리를 대신해 죽으신다. (본문 p109-111)
예수님께서는 모두가 흥겨운 잔치 자리에서 홀로 장차 닥칠 죽음의 쓴맛을 이미 맛보셨다. 그러나 우리는 그럴 필요가 없다.
클라우니 박사는 이렇게 표현했다. "예수께서 기쁨 일색인 혼인 잔치의 한가운데 앉아 장래의 슬픔을 마시셨기에 오늘 그분을 믿는 당신과 나는 세상 모든 슬픔의 한가운데 앉아 장래의 기쁨을 마실 수 있다."
(본문 p116)
구원은 철저히 수동적임을, 그 유일한 구원의 문이 예수님임을. 그리고 그것을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한시도 그것을 잊지 않으셨고, 그로 인해 우리는 아무 대가 없이 기쁨의 잔치에 참여하게 되었음이 너무나 감사합니다.
#3에서 계속 이어나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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