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집사 어디가 시즌2 #52
구원의 확신, 당신은 어떻게 확신합니까?
예전에, 뭘 잘 모르고 신앙 생활 할 때에는 그냥 그런가 보다, 나 예수님 믿는가 보다, 그러니 난 구원받나 보다... 이 정도로 생각하고 살았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참 감사하게도,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조금씩 쌓여가면서, 설교와 성경, 그리고 신앙 서적을 통해 하나님과 복음에 대해 알아갈수록 제안에는 점점 더 구원에 대한 궁금증.. 더 정확히는 구원의 확신에 대한 부분이 더 간절해져만 갔습니다.
복음서에 보면 3부류의 사람이 나옵니다.
1. 대 놓고 예수님을 미워하고 공격하던 기득권 세력(제사장, 바리새인, 사두개인, 서기관들 등등)
2. 예수님을 따르던 수많은 군중들
3. 예수님의 제자로서의 삶을 살았던 소수의 사람들
1번과 3번은 나름 명확한 거 같은데... 2번이 애매합니다. 암만 봐도 저는 3번이고 싶은 2번 같은 생각이 들어 혼란스러울 때도 있었습니다. 이 글을 읽으시는 성도님께선 어떠신가요? 잘 구별이 되시나요? 분명한 것은, 내 안에 구원에 대한 명확한 기준과 복음에 대한 분명한 지식이 없다면 분별하기 보다는 내가 믿고 싶은 대로 믿고 있을 수도 있다는 점입니다.
그런데 이런 단계에까지 도달하려면 필수적으로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바로 자신이 정말 구원받은 성도인지 의심해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매주 교회 나가고, 헌금도 내고, 더 나아가 십일조도 내고, 구역예배도 드린다 해서 내가 구원받은 성도인지에 대한 보장은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마태복음 7:21-23)
이 말씀에서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마지막 때에 자신이 당연히 구원받았다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점입니다. 그런데 너무 안타까운 것은, 많은 교회에서 구원에 대한 의심과 점검을 이야기하면 긍정적인 반응보단 매우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는 이들이 많다는 점입니다.
마치 이런 질문과 의심을 하며 고민하는 행동 자체가 마귀의 시험에 들었다고까지 극단적으로 매도하며 나무라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적잖이 들어왔기에 드리는 말씀입니다. 구원에 대한 의심과 고민은 성도라면 꼭 가져야 할 모습이라 생각합니다. 다만, 명확한 기준이 필요하겠습니다.
그 기준에 대해 2가지가 있다고 생각되며, 그중 먼저 '외적인 증거'를 살펴보겠습니다.
못된 열매 맺는 좋은 나무가 없고 또 좋은 열매 맺는 못된 나무가 없느니라 (누가복음 6:43)
나무도 좋고 열매도 좋다 하든지 나무도 좋지 않고 열매도 좋지 않다 하든지 하라 그 열매로 나무를 아느니라
(마태복음 12:33)
무릇 내게 붙어 있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그것을 제거해 버리시고 무릇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열매를 맺게 하려 하여 그것을 깨끗하게 하시느니라 (요한복음 15:2)
복음서에서 공통적으로 강조되는 외적인 증거는 바로 '열매' 입니다. 열매를 맺는 삶은 성도의 선택이 아님을 우리는 말씀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좋은 나무' 즉 구원받은 성도는 무조건 '좋은 열매'를 맺는다는 것이죠. '좋은 나무'에서 '나쁜 열매'가 날 수 없고, 그 반대도 불가능하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구원받은 성도에겐 그 안에 '성령님'이 선물로 오시고, 그 성령님께서 우리를 바꾸어 열매를 맺는 삶을 살게 하십니다. 그래서 열매는 구원받은 성도를 구별할 수 있는 외적인 증거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런 외적인 증거가 앞서 말한 것처럼 '주일날'에 보이는 모습만으로 판단해선 곤란합니다. 그 사람의 말과 행동, 삶을 통해 맺어지는 열매, 입술로 맺어지는 열매를 잘 분별해야 할 것입니다.
앞서 인용한 말씀 중 제일 마지막에 있는 요한복음 말씀이 눈에 갑니다. 다른 복음서의 말씀과는 살짝 결이 다른 느낌이 드시나요? 우리의 구원에 대해 복음서에는 '예수님께 접붙임 받은' 상태로 이야기되는데요. 그렇게 접붙임 받은 성도 중에서도 열매를 맺지 않는 성도가 있다는 의미로 해석이 되어 좀 의외의 마음이 듭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떻게' 열매를 맺는 삶을 사는가?를 고민해 봐야 합니다. 그리고 저는 이것을 '내적인 증거'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내적인 증거는 '하나님을 주님으로 모시는 삶'과 그것을 위한 나의 내적 변화가 있는지를 꼽고 싶습니다. 우리는 주님, 주님이라고 어떤 호칭처럼 자주 사용하다보니 그 참된 의미를 망각할 때가 있습니다.
주님은 '주인님'이란 뜻입니다. 그리고 주인님이라 부르는 사람은 '노예'라는 뜻입니다.
복음서가 쓰여진 당시 시대에서 노예에겐 아무런 발언권도, 어떤 것에 대한 소유권도 주장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런 것에 대한 것을 우리는 아래 말씀에서 유추해 볼 수 있을 거 같습니다.
너희 중 누구에게 밭을 갈거나 양을 치거나 하는 종이 있어 밭에서 돌아오면
그더러 곧 와 앉아서 먹으라 말할 자가 있느냐
도리어 그더러 내 먹을 것을 준비하고 띠를 띠고 내가 먹고 마시는 동안에 수종 들고
너는 그 후에 먹고 마시라 하지 않겠느냐
명한 대로 하였다고 종에게 감사하겠느냐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 (누가복음 17:7-10)
위 말씀에서 보듯이 고된 수고를 할지라도 그 수고에 대한 대가를 요구할 수 없으며, 우리가 모든 명령한 것을 다 이행하더라도 자랑할 수 없는 것이 종입니다. 우리는 흔히 주님과 쥬님의 종이란 표현을 자주 쓰지만, 정말 종이 의미하는 것을 제대로 이해한다면, 쉽게 사용하지 못할 것입니다.
1. 하나님 없이 살았던 이전까지 나의 삶이 너무도 혐오스럽고, 그 지은 죄가 너무도 끔찍함을 깨닫은 후 회개하는 삶
2. 내 안에는 더이상 선한 것과 구원의 능력이 없음을 인정하고, 구원은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받는 선물이자 은혜임을 인정하는 삶
3. 기도와 말씀을 통해 그 구원을 주권적으로 주신 하나님에 대해 더 알아가길 힘쓰길 기뻐하는 삶
4. 나의 삶의 소유권을 하나님께 돌려드리며, 내 마음과 삶의 중심, 가치관의 기준을 하나님께 두는 것.
이런 내적인 변화가 바로 또 하나의 구원의 증거라 생각합니다. 왜냐면 이런 변화는 자의로는 절대로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내적인 증거 처음 질문에 대한 답을 다시 해보겠습니다. 접붙인 가지가 열매를 못 맺을 수도 있습니까? 네 있습니다. 자신의 삶의 주도권을 끝까지 내가 쥐고 성령님께 내어 드리지 않는 사람은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외적인 증거인 '열매 맺는 삶'과 내적인 증거인 '하나님께 주도권을 돌려드리는 삶'을 보았습니다.
특히 내적인 변화는 외적인 열매에 비해 확인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말씀 앞에 자신을 돌아보아야 하고, 말씀 앞에 자신이 놓지 못하고 있던 고집과, 죄성을 내려놓고 하나님께 날마다 돌아서는, 그리고 날마다 십자가 앞에 죽어지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한 번의 변화로 부족합니다. 바울이 고린도전서에서 적은 고백처럼 "나는 날마다 죽노라"라는 고백이 날마다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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