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Main category: 일반도서 - 세상을 알자!
- Subcategory: 같은 세상을 살아가는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
- 추천 대상:
- 신앙과 성정체성 사이에서 고민하는 이들의 고민에 대해 알고 싶은 분
세상은 다양성 존중을 쉽게 이야기 합니다. 쉽게라고 말하는 이유는 꼭 교회안에서만이 아니더라도 사회적 약자의 위치에 있는 이들에 대해 무관심을 너어 '혐오'까지도 쉽게 이뤄지고 있는 현실에서 다양성을 존중해야 한다는 말들은 쉽게 내뱉고 있다는 생각이 들고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가 더욱더 비난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내재된 혐오에 대해 인정하지 않은채 이중성을 가지고 살아간다면 교회는 그런 부분에서 단호한 입장을 대내외적으로 표명하고 있기 때문이죠.
그것을 옳다, 그들이 그르다 라는 이분법적인 입장을 갖고 이 글을 적으려고 하지 않음을 미리 밝힙니다. 그리고 성소수자 분들이 읽으신다면 교회내에서 이뤄진 언어폭력에 대한 아픔으로 인해 갖는 반감으로 인해 입장을 하나로 정해 놓고 읽지는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사회적 혐오 현상은 사실 조금만 시선을 주위로 돌리면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굳이 먼 옛날로 가지 않더라도 이번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유럽이나 서구권에서 동양인 전체를 마치 바이러스 취급하는 모습이라던지, 일본에서 만연하는 혐한도 그 중 하나겠지요.
그 특징은 '합리적이지 못한 이유에 기인한 무조건적 혐오'라 할 수 있겠는데요. 예를 들어 중국 우한에서 온 중국인을 기피하는 것은 감염방지란 합리적인 이유가 있으니 무조건적 혐오라 지칭하기 어렵겠지만 앞서 얘기한 동양인들에 대한 혐오는 다르겠지요. 그런데 이것 또한 우리의 입장에서만의 판단이란 생각이 듭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서양인들을 외모만 보고 그 출신 나라나 지역을 구분하지 못하는 것처럼 그들 또한 우리는 쉽게 가능한 동양인들의 외모를 통한 출신 나라를 구별하는 것이 어렵기 때문임을 고려한다면 그 또한 혐오라 단정하긴 어렵습니다.
어떤이의 인종과, 지역과, 삶의 과정 이 모든 것이 고려되지 않는다면 혐오에 대해 쉽게 판단 할 수 없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다만, 혐오냐 아니냐를 떠나서 어떤 사회적 이슈에 대해 분명한 '갑'과 '을'이 있는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예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혐오의 문제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관계이겠지요. 저는 회사가 이스라엘 회사이기 때문에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인들에 대한 혐오를 가까이에서 지켜볼 수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팔레스타인인들은 테러리스트 그 이상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볼 때 그들은 원주민인 팔레스타인인들을 몰아내고 강제로 찢어버린 강탈자이기도 합니다. 각자의 입장이 있고 혐오냐 아니냐는 판단하기 어렵지만, 분명한 것은 갑은 이스라엘이고 을은 팔레스타인입니다. 쉽게 말해 목소리를 높일 수 있는 이가 갑이란 것이죠. 아래 내용들 중 '사회적 약자'에 대한 기준은 이 기준을 따르고 있음을 미리 적습니다.
사회적으로도 성소수자는 사회적 약자이지만 특히 교회안에서는 더 그 정도가 심한 것 같습니다. 이 글을 적은 4명의 저자는 바로 그 위치에 속한 사람들입니다. 목회자 자녀인 성소수자들의 이야기이지요. 교회안에서 성소수자란 이유로 받는 처우와 목회자 자녀이기에 교회 공동체에 직간적접으로 연관이 되있을 수 밖에 없는 입장의 이들의 이야기입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그리고 이 글을 적으면서 한가지 목적을 정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해의 목적'입니다. 함부로 혐오를 이야기하거나 함부로 사랑과 포용을 이야기하기 앞서 그들의 목소리를 듣고, 알아가는 것이 선결되야 한다는 바로 그 목적입니다.
앞서 이야기했던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간의 문제에서 느꼈던점은 이미 그 시작과 이유는 중요하게 되어버리지 않은채 감정의 깊이와 서로가 서로에게 준 상처의 아픔만 남아 서로를 할퀴고 아프게 하는데만 집중되어 버린 모습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시작은 분명히 '갑'의 위치에 있는 이들의 몫이라고 믿습니다.
저 또한 '갑'의 위치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에게도 그들의 목소리를 들어야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무조건적 인정이나 동의란 의미는 아닙니다. 지금의 많은 사회 혐오의 문제는 듣지 않고 귀를 단단히 틀어막은 채 내 목소리만 내고 내 가치관만 옳다고 이야기하는 자세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들은 후 내 이야기를 말하는 첫 걸음을 내딛기 위해 이 책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서론이 무겁고 길었죠?
일단 책의 서두에서 저자들이 자신의 성 정체성에 대해 인식하게 되었던 어릴적 이야기를 공유하는 것으로 이책은 시작합니다. 부모님이 여성적으로 키웠기 때문인 이유로 생각하는 이들도 있고, natural born으로 그러했다라고 인식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교회안에서나 가정안에서 '도덕적 기준'을 찾지 못했던 모습들입니다. '도덕적 기준'이라 적은 이유는 이 이야기를 나누는 대부분 대화에서 공통적으로 나누는 이야기에서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단어가 '죄책감'이기 때문입니다.
성적 문란함의 이유이던, 성경적 근거로 인한 동성애에 대한 죄책감이던지.. 그들은 공통적으로 죄책감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다만, 그들이 이야기하는 대화에서 동의하지 못하는 부분은 교회가 충분히 도덕적이지 않다거나, 내 가족이 그렇지 못하다는 이유를 근거삼아 본인의 죄책감에 대해 '타협'을 하고 있다는 부분입니다. 죄는 노력으로 극복되지 않습니다. 회개를 하고 돌이켜도 다시 무너질 수도 있습니다. 계속해서 반복해서 같은 죄를 짓기도 합니다. 기독교 신앙도 인간의 연약함과 한계성을 인정하는데에서 시작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죄라고 인지한 부분에 대해 타협하는 것은 기독교 신앙이 아닙니다.
어떤 이들은 그렇게 얘기할지도 모릅니다. 교회는 뭐가 다르냐고? 맞습니다. 교회안에서 더 심한 사람들도 흔히 볼 수 있고, 많은 여론조사에서 교회의 도덕성과 신뢰성에 대해서는 이미 바닥을 친지 오래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죄와의 타협은 아닙니다. 그것은 옳지 않습니다. 끊임없이 성령님을 힘입어 죄와 맞서 싸워야 하고, 그것을 용인하려는 나의 생각과 싸워야 합니다. 그것을 동성애에 한정하는 것은 분명 아닙니다. 각자 연약한 부분들이 있습니다. 성적인 부분, 물질적인 부분 등 하나님보다 앞서는 모든 것은 맞서 싸워나가야 할 죄입니다. 그런데 유난히 동성애에 대해서는 합리화하려는 시도가 많은 것처럼 보이고 이것은 동의하지 않는 부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혐오의 태도를 버려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사랑의 대상은 원수에게까지 입니다. 내 기준에 맞지 않는다고 해서 함부러 혐오를 해서는 안되는 이유는 바로 그 사랑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 때문입니다. 내 모든 생각이나 선입견보다 앞서야 하는 것이 바로 그 성경의 가르침이어야 합니다. 이 부분이 교회가, 성도가 통렬히 반성해야 하는 부분입니다.
또하나 눈여겨 본 모습은 '인정 욕구'입니다. 가족에게서 그들의 정체성을 인정받고 싶어하고 하나님께도 인정받고 싶어하는 모습을 발견합니다. 어떤 이들은 힘겹게나마 가족에게 인정을 받은(동의가 아니라 인정입니다) 이들도 있고, 어떤이들은 언젠가... 하면서 아직 가족에게 이야기하지 못한 이들도 있습니다. 사실 이부분에서 자유로운 부모가 어디 있을까요? 저도 장담을 못하겠네요. 다만, 이 책을 통해 그들의 그런 간절하 마음을 알게 된 것에 일단 만족하려 합니다. 지속적으로 고민하고 생각해 봐야 할 화두이기에 단시간의 결론은 사양합니다.
이들의 담론중에서 '천국에 갈 수 있을까?'란 질문을 화두로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 장면에서 교회의 가르침이 얼마나 이기적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분명히 말씀드리자면 성경을 통한 하나님의 가르침이 이기적인 것이 아니라 교회의 가르침이 얼마나 이기적인가입니다. 이 두가지가 다른거야?라고 반문하실 수 있겠지만... 저는 슬프게도 다르다고 이야기 하려 합니다.
흔히 알려진 것처럼 교회는 기복주의로 많이 흐르고 있는 있는 것은 익히 알고 있지만, 교회의 목적이 '구원' 혹은 '천국'으로 국한되도록 가르치는 것 또한 경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로만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내 죄를 사함받는 유일한 길이 그곳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구원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궁극적 목적일까요? 다른 말로 우리가 믿는 믿음의 목적이 단지 내 한몸 구원받는 것에 있을까요? 저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만약 그랬다면 구약과 신약을 통털어 하나님의 가르침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일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시선은 '나'에 국한되지 않고 '우리'로 확대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교회에서 구원 이후의 성도의 삶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성도의 삶의 모습이 사회적으로 귀감이 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아픔과 충돌을 감수하면서라도 많은 이들의 목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사회적 약자들의 친구로 이땅에 계셨고, 사회적 혐오 시선을 같이 받는 것을 감수하면서까지 그들의 목소리를 듣고 함께 식사하고 그들 중에 함께 계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당장 예수님처럼 할 수는 없을진 모르지만, 적어도 그들의 목소리를 듣는 시도를 시작하는 것은 할 수 있습니다. 나의 가치관과 기준을 잠시 내려놓고 나와 다른 이들의 목소리를 듣는 것을 시작해 보는 것은 어떨까요?
'일반도서 - 세상을 알자! > 같은 세상을 사는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세계가 만일 100명의 마을이라면 / 이케다 가요코 / 국일미디어 (0) | 2020.04.04 |
---|---|
나는 강박장애입니다 / 쓰쓰미 료지로 / 시그마북스 (0) | 2020.03.07 |
내가 선택한 일터, 싱가포르에서 / 임효진 / 산지니 (0) | 2020.01.21 |
지하철에서 옆자리에 흑인이 앉았다 / 예롱 / 뿌리와 이파리 (0) | 2019.12.12 |
그림으로 읽는 유럽의 난민 / 케이트 에번스 / 푸른지식 (0) | 2019.11.21 |
댓글